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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건우 Jul 02. 2018

두 남자

1966년, 프라하의  나로드니가의 도로 옆에 있는 카페 루브르.  2층에 카페가 있는 건물은 고딕 양식의 7층 건물로 창문 주위에 아름다운 문양을 새겨 넣었다. 도로쪽 정면에서 보면 5층처럼 보이지만, 옆면에서 보면 7층 건물이었다. 건물 끝에서 도로가 갈라지고, 트렘이 건물을 따라 휘어돌아가고 있었다. 전쟁 중에도 건물은 비교적 온전했고, 도로를 따라 주변으로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고 있었다. 건물 앞 도로는 포석이 깔린 길로, 최초의 도로는 로마시대에 생겼다. 로마군은 지금의 체코를 점령하면서 가장 먼저 도로를 만들었는데, 그때 마차 두 대가 지나다닐 수 있는 너비인 4.9미터의 도로를 돌을 깔아 만든 것이다. 이후 도로는 조금씩 넓어졌고, 전쟁이 끝나고 지금처럼 자동차가 왕복하고, 양쪽에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길을 만들어 프라하 시내에서 주요한 도로가 되었다.

카페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좁고 긴 카페 내부는 작은 탁자들이 벽을 따라 놓여 있고, 가운데 줄도 탁자가 놓였다. 저녁시간이어서 식사를 하는 사람과 차를 마시는 사람이 반씩 섞여 있었다. 검은 뿔테 안경을 쓴 중년의 사내는 카페에 들어서면서 빠르게 실내를 둘러봤다. 몸에 밴 습관인듯, 자연스럽고 빠른 행동이었다. 사내는 주변을 곁눈질하며 안쪽으로 걸어들어가 빈 자리에 앉았다. 그의 외투는 낡았고, 안경은 어색해 보였다. 웨이터가 주문을 받으러 왔을 때, 그는 메뉴판을 들여다보며 서툰 영어로 주문했다. 하지만 웨이터가 영어를 알아듣지 못했고, 사내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옆 자리에 앉아 있던 노인이 사내에게 말을 걸었다.

"주제넘지만, 제가 좀 도와드려도 될까요?"

노인의 영어도 유창하지는 않았다. 밝은 은발 아래로 깊고 어두운 눈빛이 침착하게 가라앉아 보이는 표정의 노인은 가볍게 웃음을 물고 있었다. 그의 테이블에는 커피잔이 놓여 있었다.

"아, 고맙습니다."

노인은 사내가 주문하는 내용을 웨이터에게 독일어로 통역해주었다. 사내는 노인에게 인사했다. 고개를 들어 노인을 바라보는 사내의 눈은 크고 맑았다. 사내는 주머니에서 시가케이스를 꺼내 열고는 시가 한 개피를 노인에게 권했다. 

"고맙지만, 담배를 피우지 않습니다."

노인은 노트에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글을 쓰다말고 노인은 사내의 얼굴을 바라봤다.

"여행을 오셨나보군요."

노인의 말에 사내는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다른 곳으로 가기 위해 잠시 머무르고 있습니다."

웨이터가 식전 빵이 담긴 바구니를 들고 왔다. 검은빵과 흰빵이 각각 두 조각씩 들어 있고, 바질이 올려진 버터가 작은 컵에 담겨 있었다. 사내는 벌써 두 달 가까이 프라하에서 지내고 있지만, 늘 밥을 먹을 때마다 그의 고향 아르헨티나와 영혼의 고향인 쿠바를 떠올렸다. 그곳의 민중들은 감자조차도 배부르게 먹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남아메리카 대륙의 여러 나라를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면서 보고 느꼈던 감정과 쿠바에서 피델과 함께 죽을 고비를 넘기며 무장투쟁을 하던 때를 떠올리면, 지금의 일상은 마치 부르주아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그렇기에 사내는 마음이 편치않았다.

웨이터가 음식 접시를 들고 왔다. 월도프 샐러드, 굴라쉬, 스비치코바. 월도프 샐러드는 사과, 호두, 포도, 양배추를 마요네즈에 버무렸다. 스비치코바는 소고기 안심과 크네들리키 빵을 소스에 곁들어 먹는 음식으로, 빵이 부드럽고 소스는 잼처럼 달콤했다. 굴라쉬는 쇠고기 스프처럼 걸죽한 국물에 쫀득한 빵을 찍어먹는 음식이었다. 사내의 입맛에도 음식은 맛있었다. 지구 반대편의 대륙에서 먹던 음식과는 사뭇 달랐지만, 체코의 음식은 소박하면서도 깊이가 있었다.

사내는 밥을 먹으면서도 가끔 카페의 문쪽을 바라보고, 주위를 둘러봤다. 

밥을 다 먹고 나서 웨이터가 가져온 커피를 마시며 쿠바산 시가를 피우자 사내는 비로소 마음이 느긋해졌다. 그는 다시는 쿠바로 돌아가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콩고에서 실패하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숨어든 곳이 프라하였다. 적어도 거의 모든 사람은 그가 콩고에서 사라져 프라하로 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사내는 시가를 피우며 옆 자리의 노인을 보았다. 노인은 커피를 조금씩 마시며 노트에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노인께서는 글 쓰는 일을 하십니까?"

사내가 묻자 노인은 고개를 조금 돌려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저 취미로 쓰고 있다오. 평생을 보험회사에 다니다 퇴직하니 시간도 있고, 할 줄 아는 거라곤 젊어서부터 종이에 무언가를 쓰는 일이 전부라서 말이오. 선생도 소설 좋아하시오?"

"네, 좋아합니다. 그러고보니 여기 프라하에 오니 랑게르의 소설이 생각나는군요. 그가 작년에 죽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만. 차페크도 알고 있습니다. 그가 쓴 희곡에서 '로봇'이라는 단어를 처음 쓴 작가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저는 카프카가 좋더군요. 제 고향에서도 카프카의 작품은 번역 출판을 했는데, '성'과 '소송', '실종자' 같은 소설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노인께서도 소설을 쓰시나요?"

사내의 말을 듣고 있던 노인의 표정이 밝아졌다. 

"대단한 건 아니지만, 어떤 남자가 아침에 일어나니 벌레로 변한 이야기를 쓰고 있다오. 그런데 선생은 고향이 먼 곳인가요?"

"네, 아르헨티나가 고향입니다. 지금은 사업 때문에 아프리카에 왔다가 잠시 이곳에 들렀습니다. 작년에는 알제리에서 머물렀고, 올해는 콩고에 머물다 왔습니다. 떠돌이 장사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륙과 대륙을 옮겨다니다니, 그저 부럽기만 합니다그려. 나는 고작해야 유럽의 몇 나라밖에는 다니질 못했다오. 이제는 늙어서 그나마도 갈 능력이 안 되고 말이오. 고향이 아르헨티나라고 하니 생각납니다만, 몇 해 전에 쿠바에서 혁명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소. 사회주의 혁명이라고 하던데, 미국이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겠죠?" 

"미국은 쿠바 뿐아니라 남미 여러 나라에서 이미 악랄한 짓을 벌이고 있습니다. 유럽과는 차원이 다르죠. 쿠바의 사탕수수 농장을 지배하는 건 미국의 자본가들이니까요. 콜롬버스가 대서양을 건너 처음 땅에 발을 디딘 것이 쿠바였고, 아프리카 노예와 중국, 일본, 한국에서 이민노동자가 밀물처럼 들어온 곳도 쿠바였습니다. 사탕수수로 돈을 번 미국자본가들이 빨대를 꼽고 단물만 빨아먹는 거죠. 게다가 쿠바의 호텔 카지노는 미국의 마피아가 지배하고 있고, 남미에서 생산한 마약을 쿠바를 거쳐 미국 본토로 실어나르는 중간기지 역할을 하고 있기도 하죠. 피델 카스트로는 쿠바 민중이 당하는 고통을 해방시키기 위해 혁명을 일으켰고, 지금 잘 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가 세계 여러 나라의 혁명에 큰 관심이 없다는 건 아쉬운 점이죠."

"역시 사업을 하는 분이라 세계 정세를 잘 알고 있군요. 나는 그런 정치적인 문제들은 잘 모릅니다만, 쿠바 혁명으로 미국이 좀 곤란해진 듯 하군요. 코밑에 쏘련의 친구가 자리잡게 되었으니 말이오."

"미국 뿐아니라 언젠가는 세계 모든 나라에서 혁명이 발발하고, 자본가를 끌어내려 다수의 민중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아갈 날이 오지 않겠습니까."

사내는 남은 커피를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인은 이제 막 단편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끝냈다. 제목은 '변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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