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전

창작시

by 백건우

정 전

아직도 까마득한 오후시간

지겨운 작업을 잊으려

아가씨 삼삼한 몸매를 그리며

아픈 다리로 버티고 있는데

느닷없이 형광등이 껌벅거리더니

전기가 나가버린다

웅웅거리던 기계소리 숨이 멎고

주위는 순간 어둠과 정적으로

작업 끝난 시간처럼 한가하다

물량이 딸리면 어떠냐

토요일 잔업을 해도 좋다

피곤한 몸뚱아리 쉴 수 있다면

전기야 오랫동안 들어오지 말아라

이왕이면 오후작업 제낄 수 있도록

은근한 바램으로 마음 설레이는데

고단한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음만 부풀리고

전기는 들어오고 말았다

에라, 그러면 그렇지

노동자가 무슨 복으로 공짜를 바랄까

힘들고 피곤해도 움직여야지

내 손으로 당당하게 노동을 하고

공짜는 아예 꿈도 꾸지 말아야지

올림픽복권 꿈 좋다고 사봤다가

열장 중에 한 장도 안맞듯이

꿈만 좋다고 현실이 좋아질건가

계속되는 야근으로 지치고 힘겨울 때면

정말이지 전기라도 콱 나가버렸으면 하고

보란듯이 1등 복권 당첨되는 꿈도 꾸지만

찬 물에 세수하고 오줌 한번 싸고 나면

눈 앞에는 확실하게 기계소리 콘베어와

줄지어 몰려오는 제품들의 행렬

여기가 바로 내 자리인 것이다

내가 설 자리는 생생한 현장이며

몸으로 부딪쳐 느끼는 생산의 일선

저임금에 장시간 노동으로 힘겨워도

생산자가 주인되는 세상을 위하여

그날이 오기까지 오랜 세월을

기다리며 지켜나갈 것이다

잠깐의 정전으로는

우리의 노동을 기쁘게 할 수가 없듯이

우리의 삶을 몰아세우는

비인간적인 노동조건 속에서

우리는 결코 보람된 노동을 할 수가 없다

노동자가 공장의 당연한 주인이 되고

농민이 토지의 영원한 주인이 되는 날

그날이 오기까지 어떠한 휴식도

나에게 만족을 줄 수 없는 것이다

8시간 노동으로 생활을 찾고

최저임금제로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다지만

내가 만든 물건이 내 것이 아니고

생산을 하면서 기쁨을 느끼지 못하면

그것은 아직도 노동자의 세상은 아니다

노동자는 노동자이기 이전에 인간이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평등했다

자라 세상에 살면서

평등은 어느 귀족의 노리개로 저당잡히고

값싼 자유를 구걸해 쓰는

노동자와 자본가와 계급만이 남았다

소수에 의해 다수가 착취 당하고

돈과 재물에 의해 인격이 결정되고

생산보다 소비와 쾌락이 더 가치있게 말해지는 오늘날

만드는 자와 쓰는 자의 차이는 곧

못사는 자와 잘사는 자이며

못사는 우리는 잘사는 너희들을 위해

종처럼 노예처럼 허리 굽히며

더러운 일 귀찮은 일 힘겨운 일을 맡아

오늘도 수없이 죽어나가고 있다

우리들 피의 댓가로 살찌는

너희들 배부른 자의 자리는

마땅히 우리들의 차지여야 한다

누려야 할 자리를 누리지 못하고

언제나 피 흘리며 쌓아온

안락과 부의 자리가

평등하게 분배되지 못할 때

우리들은 분노한다

잠시의 정전과 빵부스러기로

우리들의 분노를 달랠수 있으리라 믿지마라

언제나 빼앗겨온 우리지만

우리가 우리 것을 찾기 위해 일어서는 날

그 날에 너희는 보리라

너희들이 지키고 아껴온 모든 것

너희들이 누리고 쌓아온 모든 것

재물 권력 명예 체통

기름기 낀 너희들의 뱃가죽

번들거리는 너희들의 대가리

죽창과 낫의 번득임 아래

노동으로 거칠어진 우리들 억센 손아귀에

잘리우고 한꺼번에 무너지리라는 것을

그리하여 우리는 새롭게 열리라

단잠을 자고 난 후 새벽을 맞을 때처럼

싱싱하고 상쾌한 우리들의 아침을

노동의 현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즐겁고 행복한 마음으로 충만하기를

동지들의 눈빛은 빛나고

희망으로 밝게 웃는 얼굴과

다정한 미소로 인사하는 아침이기를

그리하여 마침내

노동은 삶의 질곡이 아니라

삶을 창조하는 것이며

인간의 위대한 능력이라는 것을

너희들처럼 일하지 않고 먹는 자는

스스로 부끄럽도록 하리라

노동의 아름다움과

노동의 신성함과

노동의 고귀함을 모르는 자들을 위해

우리는 우리의 고통

억압과 착취의 사슬을 끊고

어두운 세상을 폐하리라

그것은 정전된 어두움 속에

환한 불빛을 밝히듯이

무지와 편협으로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들의 가슴에 진실의

종소리를 울리는 것이다

노동을 천시하고

노동자를 멸시하는

잘못된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

그들의 무지를 깨우쳐 주는 것

그것도 노동자 우리가 할 일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지만

우리를 인간답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

정치 경제 문화 그리고

이데올로기

그것을 이용해서 스스로의

배를 채우는 자들을 향해

가차없는 투쟁의 횃불을 들 것이다

우리가 누리는 것은 전부가 누리는 것이고

우리의 노동은 우리들 모두를 위하여

우리들 스스로 하는 것이다

투쟁과 혁명은 우리 손으로

우리의 평등한 손으로 할 것이며

혁명으로 흘리는 피는

우리들의 아름다운 미래와

평등하고 자유로운 세상에서

펄럭이는 깃발이 될 것이며

푸른 하늘을 날아오르는

자유의 함성으로 살아날 것이다

노동해방 만세 !

평등세상 만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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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를 쓸 때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합니다. 1980년대 중반, 구로공단에 있는 공장에 다닐 때, 어느날 잠깐 정전이 되어 기계가 멈췄고, 우리 노동자들은 쉴 수 있었습니다. 그 시간이 오래지 않았지만, 노동의 고통스러움과 노동에서 해방되는 상상을 하며 이 글을 썼습니다. 지금은 노동환경이 예전보다 좋아졌겠습니다만, 먹고 살기 위한 노동은 여전히 '즐거운 노동'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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