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을 찢어내며

창작시

by 백건우

달력을 찢어내며



달력을 찢어내며

질서있게 늘어선 숫자들이 구겨질 때

내 마음속에 걸려 있는 미래도

흔적없이 찢겨 나가고

숫자 속에 들어있는 희망도

비참하게 구겨져

화사한 오월 아래 창백한 얼굴


달력의 숫자만큼이나 많은 이력서를

날마다 뿌리며 돌아나오는

공장 수위실 벽에 걸린 커다란 달력에는

한 달의 마지막 붉은 숫자

오늘도 하루를 뜨거운 햇살에 쫓기며

낯선 시선에 허덕거리며

가슴 속 희망이 땀에 절어 찢겨 나가는데

기름때 묻은 작업복에 마디 굵은 손가락

밝은 거리에 내놓기 부끄러워

날마다 어두운 골방에서 달력을 찢는다


달력을 찢어내면

오월의 하늘 위로 구름이 흘러가듯

목력이 떨어져 썩어지듯

시간은 덩어리져 몰려가고

흔적으로 남는건 불확실한 생활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더욱 자유롭지 못한 불편함과

영혼을 억누르는 빈 시간

바람은 자꾸 달력을 찢어내고

시간은 어둠 속으로 이끌려들어가는데

찢기워진 달력 속으로

절름거리며 달려 온 생활

보장없는 미래


최루탄 가스에 절은

달력을 찢어내며

분노의 함성

피끓는 절규를 듣는다

미소 속에 감추어진

잔인한 거짓을 들춰내며

달콤한 현실타협의

왜곡된 진실을 벗겨내며

폭력으로 미화된

역사의 뿌리를 캐내며

힘찬 부르짖음으로

우리의 삶을 터뜨리는

절절한 외침을 듣는다


달력을 찢어내며

새롭게 나타나는 달력 속에

한숨과 절망으로 달려있는

낯선 미래를 바라보며

또 다시 숫자의 징검다리를

어설픈 몸짓으로 밟고 건너야 하는

메마른 삶을 생각한다

열두 장 달력 중에

여섯 장이 찢겨나가도

공허한 생활

생산 없는 하루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부끄러워하며 절망하며

하얀 손 창백한 얼굴

기름때를 묻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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