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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건우 May 12. 2019

이윤의 사유화, 권력의 사유화, 배움의 사유화

이윤의 사유화

이윤의 사유화, 권력의 사유화, 배움의 사유화


1 이윤의 사유화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땅, 공장, 기계, 재료를 소유한 자본가가 노동자를 고용해 임금을 주고 상품을 생산한다. 노동자는 시간당 임금을 받고 자신의 '노동력'을 자본가에게 판매하고, 그렇게 생산한 '상품'은 시장에서 판매된다. 자본가가 투자한 땅, 공장, 기계, 재료에다 노동자의 '노동력'이 결합해 상품이 완성되고, '이윤'은 노동자가 투입하는 시간에서 발생한다고 마르크스는 말했다.

즉, 상품 가격이 1만원이라면, 자본가는 생산단가를 7천원에 만들어 3천원의 이윤을 갖는다. 생산단가 7천원에는 자본가가 가지고 있는 땅, 공장, 기계, 재료비와 기회비용, 감가상각 등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고, 노동자의 임금-의료보혐료, 국민연금, 고용보험, 산재보험이 포함되었거나 또는 포함되지 않은 경우도 있다-도 들어 있다.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주어야 할 임금에서 자신의 이윤을 가져간다. 즉, 노동자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것이다. 이런 내용의 설명은 마르크스의 '자본'에 자세하고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으니 쉽게 알 수 있는 내용이다.

이윤의 사유화-자본가가 모든 이윤을 독점하는-는 자본주의 체제를 이루는 두 개의 기둥-착취와 이윤-가운데 하나다.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말한다. 스스로 노력하고, 경쟁해서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제도가 자본주의이고,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평등해서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고, 무능한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유능한 사람들만 고생하는 것이 공산주의라고. 

그들은 정확히 틀렸다. 자본주의에서 경쟁은 절대 공정하지 않으면, 소수의 자본가가 발생하는 이윤의 90% 이상을 가져가는 구조로 짜여졌다. 이런 사실은 이미 200년 이상의 통계와 빈익빈, 부익부의 집중을 통해 알려진 사실이다.

20세기 초반, 미국에서 노동자의 하루 임금이 1달러일 때, 몇몇 자본가는 100달러짜리 지폐에 불을 붙여 시가 담배를 피웠다. 그 돈이면 100명의 노동자가 1달러씩을 더 받을 수 있지만, 자본가는 돈을 불에 태워 버릴지언정 노동자에게는 임금을 많이 주려 하지 않았다.

19세기까지도 영국에서는 아동노동이 심각했다. 불과 8살짜리 어린이가 하루 14시간을 햇빛이 들지 않는 탄광에서 석탄 캐는 일을 했고, 그들의 수명은 스무 살을 넘지 못했다. 한국에서는 80년대까지 여성노동자들은 저임금에 하루 18시간 이상 노동했고, 전태일 열사의 일기에는 여성 노동자의 고통이 잘 드러나 있다.

자본주의가 공정한 경쟁을 통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한다고 말한다면, 왜 자본가는 노동조합을 설립하는 노동자들과 노동운동 지도자들을 협박하고, 린치하고, 살해하는가. 미국의 노동조합이 처절하게 깨져나간 이유는, 자본가들이 마피아와 조직폭력단을 동원해 노동조합 조합원과 지도자를 린치를 하고, 살해했기 때문이다.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많은 젊은 노동자들이 직업병으로 고생하거나 죽었을 때, 그 기업의 대표가 잘못을 인정하고 충분한 보상을 한 적이 있는가. 아니, 그 전에, 노동자가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공장의 환경을 만들기는 했던가. 공사장에서도 노동자들이 추락하거나 부상을 당해 죽어가고 있다. 노동자는 단지 소모품에 불과한 것이 바로 자본주의의 본질이다. 노동자는 자본가의 이윤을 위해 부속품으로 쓰일 뿐, 자신의 삶을 살아가지 못한다. 지금은 주5일, 하루 8시간 노동제가 형식적으로 이루어지지만, 과거에는 노동시간이 보통 12시간, 많으면 14시간에서 16시간이었다. 12시간 맞교대(주야간) 노동도 일상이었고, 그런 삶을 사는 노동자는 '자신의 삶'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었다.

이윤의 사유화는 그래서 악마의 제도다. 자본주의를 찬양하는 자는 딱 세 부류다. 자신이 자본가여서, 이 체제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자와 그런 자본가의 똥구멍을 핥아주면서 먹고 사는 사이비 지식인들, 그리고 자본주의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어리석고 멍청한 인간들이 그들이다.

하지만, '어리석고 멍청한' 인간을 마냥 비난하는 건 옳지 않다. 자본(가)은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 목적인데,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파편화시킨다. 노동자는 노동에서 소외되고, 대가족은 핵가족으로 분열하며, 핵가족은 1인 가족으로 쪼개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저임금 구조를 유지하며, 일자리를 두고 경쟁하도록 만들고, 먹고 사는 문제에 매달려 자본주의의 본질 즉 착취에 관해 깊이 생각하지 못하게 한다. 

자본의 원시적 축적 단계를 지나, 어느 정도 성장한 다음에는 한 가족(가정)의 가장 혼자 노동을 해서도 가족 모두가 먹고 살았던 시기가 있었다. 1950년대 미국의 (백인)가정은 평균 가족 수가 4-5명일 때, 가장(주로 남성, 아버지, 남편)이 직장에 다니며 받은 월급으로 가족이 먹고 살 수 있었고, 포드에서 생산한 자동차를 소유할 수 있었다. 그들은 노동계급이었지만 자신들을 '중산층'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한국에서도 아주 짧은 시기, 이런 현상이 있었다. 가장이 혼자 벌어서 가족 모두를 먹여 살릴 수 있었던 것은, 임금이 높아서라기 보다는 4-5명이 생활할 수 있을 정도의 임금에 물가가 비교적 쌌기 때문이다. 물가를 통제하는 것은 정부인데, 정부는 자본가의 이해를 대리하거나 그들과 공생하므로 가장 먼저 농수산물 가격을 낮게 유지해서 노동자들의 식생활을 보장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본(가)은 노동의 수요가 증가하자 여성노동자의 고용을 적극 활용한다. 여기에는 여성들의 사회 진출에 대한 열망이 결합하면서 여성 노동자의 수요는 급격히 늘어나고, 노동자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저임금 구조는 고착한다. 

더구나 어느 나라에서나 여성은 남성에 비해 낮은 임금을 받으며 차별당하고,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진급에 불이익을 받는다. 여성은 힘든 육체노동을 하는 남성 노동자보다는 덜 하지만,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거나 단순, 반복 노동으로 오히려 육체적 소모가 심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노동자가 증가하면서 임금은 상대적으로 낮아지고, 이제 가정에서는 부부가 노동을 하고, 아이들은 탁아소, 어린이집, 유치원 등에 맡기게 된다. 가사 노동에 관한 정당한 평가와 경제적 지불을 하지 않는 것은 자본의 전략이다. 가사 노동을 경제적 가치로 환산하면 연간 약 8천만원의 임금에 해당한다는 보고가 있지만, 가사 노동을 주로 하는 여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인정은 매우 미미한데, 이것은 이윤을 창출하지 않는 노동에 대한 자본주의적 시각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제는 부부의 노동으로도 부족해서 고등학생도 아르바이트를 해야 한다. 교육 문제로 들어가면 자본(가)이 얼마나 철저하게 계급화, 서열화 하는가를 알 수 있다. 소위 명문고, 명문대를 규정한 것은 누구인가. 왜 사교육은 공교육을 앞지르고, 공교육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되었는가. 왜 대학에 진학하려고 안간힘을 쓰는가. 그리고 수 많은 탈락자들은 어떻게 되는가. 이런 물음은 곧바로 자본주의의 본질에 잇닿아 있다.

유치원 때부터 '영어유치원'이라는 형태로 차별과 경쟁을 시작하면서 부모는 자식을 더 좋은 학교, 다른 아이들보다 더 우월한 경쟁 상태에 놓이도록 수입의 절반을 쏟아붓는다. 유치원부터 영어를 가르치고, 초등학교에서는 여러 개의 학원을 뺑뺑이 돌리며 선행 학습을 하고, 중고등학교에서는 그들이 말하는 일류대학교에 입학시키기 위해 고액 과외와 쪽집게 과외를 시킨다. 그렇게 들어가는 사교육비는 한 해 무려 20조원이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돈을 쏟아부어도 소위 일류대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95% 이상의 대학생들의 삶은 여전히 비참하다. 그들은 취업을 위해 취업고시 준비를 해야 하고, 대학등록금을 대출받은 학생은 사회에 진입하기 전부터 이미 빚더미를 안고 출발해야 한다. 

1인 가구가 전체 가구의 25%가 넘는데, 이들 대부분이 청년이거나 노인들이다. 이들이 매월 내야 하는 임대료는 건물주의 수입이 되고, 가난한 사람을 더욱 착취하는 임대소득자에 대한 강력한 세금 정책은 보이지 않는다. 토지와 건물을 소유한 자본가는 아주 적은 세금만 내고 막대한 이윤을 가져가는 구조가 바로 자본주의다.

자본주의를 한 마디로 정리하면, 수 많은 사람들의 등에 빨대를 꼽고 피를 빨아먹는 소수의 거인이 있다고 보면 된다. 자본(가)은 그렇다고 노예제처럼 노골적으로 채찍을 휘두르며 착취하지는 않는다. 발달하는 과학기술과 세련한 문화예술의 힘을 빌어 가난한 사람들을 위로한다. 텔레비전에서는 늘 행복하고 재미있는 내용을 방송하고, 인터넷에는 간접 경험을 할 수 있는 무수히 많은 컨텐츠가 무료로 제공된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자신의 삶을 꿈꾸고, 지금보다 나은 미래를 상상한다. 다만 그들의 꿈과 희망은 거의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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