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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건우 May 18. 2019

이윤의 사유화, 권력의 사유화, 배움의 사유화

2 권력의 사유화

2 권력의 사유화     

권력은 집단에서 나온다. 초기의 권력은 동물처럼 살아가던 시기의 물리적 폭력이었다. 힘이 강한 자가 집단의 우두머리가 되는 것은 동물의 진화와 생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인류가 동물의 단계를 벗어나면서, 권력은 ‘지혜’를 가진 자에게로 옮겨갔다. 한 무리의 씨족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은 자, 무리를 위험에 빠뜨리지 않고, 먹이를 쉽고 많이 구할 수 있으며, 무리의 안전을 지켜줄 수 있는 자는 나이 많고, 경험이 풍부한 무리의 우두머리였다. 

그들은 수렵, 채집 경제에서 무리가 모아 온 식량을 재분배할 권한을 가졌고, 무리가 이동할 때 가장 앞장섰으며, 천적의 공격을 예상해 길을 돌아가거나, 천적과 마주쳤을 때 무리가 힘을 모아 방어할 수 있는 지혜를 내놓았다. 무리는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우두머리를 존경하고 그의 지도에 따랐다.

인류가 정착 생활을 하면서, 그들이 지은 농산물에서 잉여생산물이 발생하게 되고, 무리의 우두머리는 농사를 짓지 않고 잉여생산물의 일부를 자신의 몫으로 가져갔다. 우두머리는 농사와 전쟁, 질병에서 무리를 구하는 제사장으로 변신하고, 불가사의한 자연의 변화와 무리의 죽음을 설명하는 초능력을 갖게 되었다고 무리에게 말한다. 그렇게 한 무리에서 권력을 독점하는 과정은 잉여생산물의 발생과 시작을 함께 한다.

오늘날 권력은 대의민주주의에서 나오지만, 권력을 가진 자의 대부분은 권력을 사유화한다. 권력의 독점은 최근까지 지속되었고, 형식적 민주주의가 자리 잡은 것은 자본주의의 시작과 함께 한다. 봉건제와 왕정의 폐지에 앞장선 것은 다름 아닌 신흥 부르주아였으며, 그들은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시대를 이끌었다. 자본주의의 발생과 함께 부르주아와 노동자는 동시에 탄생했지만, 역사는 ‘자본주의’와 ‘자본가’를 주인으로 기록하고 있다. 자본이 주인이 되는 세상에서 노동자는 자본가에 대항하는 필연적 계급이지만 권력의 관계는 이전 체제-노예제, 농노제, 봉건제-와 다르지 않다. 

앞선 체제에서도 권력의 독점은 집단의 10%가 장악하고 있었고, 그들이 소유한 폭력집단(군대)이 체제를 보호하고 유지했다. 오늘날 대의민주주의 체제에서도 권력을 장악한 소수의 무리는 합법의 틀이라는 명목으로 강력한 폭력집단-경찰, 군대-을 운용한다.

민주주의 체제는 형식적으로 삼권 분립의 형태를 유지한다. 하지만 그 삼권을 장악한 권력은 서로를 견제하는 역할을 부여했지만, 내부적으로 권력의 유지와 독점, 권력을 사용한 사적 이익의 추구를 공유한다. 이 명제가 절대적이지는 않고, 어떤 성향의 그룹이 권력을 장악하느냐에 따라 권력의 사유화가 사라지기도 한다. 하지만, 분명하고 명백한 사실은, 권력을 장악하는 그룹(정당)의 목적은 ‘권력의 쟁취’ 자체가 목적이고, 그것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큰 목표이자 관심이다. 그들이 지지자 그룹-다수의 시민-을 위한 많은 복지 정책과 경제, 사회, 문화 정책을 펼치는 것은 두 가지 목표가 합치하기 때문이다. 즉, 대 국민 서비스의 품질을 높이면 그 집단이 자신들을 계속 지지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으므로, 국민에게는 편익을, 자신의 그룹에게는 권력의 지속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게 되는 것이다.

반면 소수 그룹이 권력을 장악한 다음, 대 국민 서비스의 품질을 높이기보다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함께 하는 소수의 지배그룹-여기서는 재벌, 대기업이라고 하자-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경우가 바로 권력의 사유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권력의 사유화는 거의 대부분 경제적 이익과 깊은 관련이 있고, 권력과 재물은 상호 보완 관계를 유지한다. 이들 그룹은 사회적 이익을 공유할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혼인을 통해 혈연으로 연결되어 권력과 금력을 공고하게 유지한다.

한국현대사에서 권력의 사유화는 드라마틱하게 드러났으며, 세계의 다양한 징후들을 시기별로 목격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나라에 해당한다. 해방 이후 이승만은 독립운동가의 탈을 쓰고 외국에서 귀국해 초대 대통령이 된다. 그는 이미 임시정부에서 대통령을 했지만, 그때 탄핵되었고, 그의 독립운동 태도에 심각한 결함이 있다는 것이 임시정부와 많은 독립운동가 사이에서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이승만은 유창한 영어와 미국과의 인연으로 초대 대통령이 되었고, 자신이 민주주의 공화국의 대통령이라는 직무를 망각하고, 조선 왕조의 마지막 왕처럼 행동했다. 그는 가장 먼저 정치적 경쟁자인 김구, 여운형, 김성수 등을 암살했고, 친일매국노를 처벌하려는 반민족행위특별위원회를 매국경찰(일제강점기 시기 경찰이었던 조선인)을 앞세워 폭력으로 해산했다.

이승만의 뒤에는 언제나 미군정이 있었고, 미군정은 미국 정부의 지시를 받아 미국의 이익에 충실히 복무하고 있었으니, 이승만은 미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그는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가장 먼저 대전으로 도망했고, 심지어 일본으로 망명해 그곳에 망명정부를 꾸릴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승만은 자신은 몰래 도망하면서 서울 시민에게는 끝까지 사수하라는 방송을 내보내고, 한강 철교를 폭격해 수많은 민중이 아군의 폭탄에 죽도록 만들었다.

보도연맹,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수십만 명에서 백만 명 이상의 청년을 학살하거나 굶겨 죽인 것도 이승만이다. 그는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했고, 해방 정국과 한국전쟁이라는 야만의 시간과 공간에서 자신의 권력을 오만하게 누리다 결국 4.19혁명으로 자리에서 쫓겨나 하와이에서 죽었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제3세계에서는 빈번하게 군부쿠데타가 발생했다. 이 현상은 마치 연쇄 폭발처럼 중남미와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동사다발로 발생했는데, 군부쿠데타의 발생 원인은 나라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군부가 정치에 개입하면서 저개발국가들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쿠데타를 일으킨 대부분 세력은 미국의 이익에 복무했고, 그들 뒤에는 미국의 정보기관 CIA가 있었다. 제3세계 나라의 장교들 일부는 미국의 군사기지로 유학을 와서 훈련을 받았고, 미국으로부터 특별한 대접을 받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특별한 존재라고 인식했고, 미국처럼 잘 사는 나라는 만들기 위해서는 자신이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고 믿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어서, 1961년, 박정희 소장은 쿠데타를 모의하고, 권력을 잡고 있던 민주당을 폭력으로 제압해 권력을 찬탈한다. 박정희는 쿠데타가 실패하면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쿠데타를 일으킨 명분을 만들었다. 4.19혁명으로 이승만이 쫓겨가고, 민주당이 집권했으나 정세는 불안하고, 경제 역시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박정희는 집권당이 무능하다고 공격했고, 폭력을 동원해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몇몇 정책을 실행에 옮긴다. 

겉으로는 부랑아, 깡패를 단속하고 치안을 강화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그들과 함께 진보적 인사들, 쿠데타를 비판하는 사람들, 노동조합원, 사회주의자, 지식인 등을 억압하고 격리하기 시작했다. 박정희는 비판 세력을 압살한 다음, 북한의 김일성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열등한 자신의 위치를 만회하기 위해 북한의 정책을 모방하기 시작했다. 당시 북한은 남한보다 우월한 경제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념과 체제, 경제, 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남한을 앞서 있었다.

박정희는 불법으로 대통령이 되었고, 새마을운동(북한의 천리마운동의 복사판)을 추진했으며, 미국과 일본의 지원을 받아 수출드라이브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노동자의 저임금을 유지하기 위해 농촌에 있던 청년을 도시로 유입시키고, 쌀 가격을 낮게 유지해 노동자의 저임금이 가능하도록 정책을 가져갔다. 당시 인구의 절대 비중을 차지하던 농촌 인구 가운데 청년들은 도시에서 노동자로 일하며 버는 수입이 농사를 지어 버는 수입보다 많았으므로, 저임금에도 불구하고 도시의 공장과 서비스업으로 진출했다.

이로 인해 도시는 팽창하고, 도시 외곽으로 농촌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빈민촌이 형성되었다. 2000년대까지 도시의 외곽에 존재한 판자촌은 도시빈민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냈으며, 이는 지금도 제3세계-남미, 아프리카,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박정희는 절대 권력을 추구했고, 자신의 권력의 임기를 제한 없이 누리기 위한 초법적 조치를 강행했지만, 결국 측근의 총에 맞아 죽었다. 박정희는 미국이라는 든든한 배경을 두고, 미국의 이익과 자신의 이익을 동시에 추구했으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다 비참하게 죽었다. 권력의 사유화가 드러내는 가장 극적인 장면이 바로 ‘독재자의 주검’이다. 이는 역사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데, 히틀러, 무솔리니, 카다피, 후세인, 이디 아민, 차우셰스쿠를 비롯한 독재자들의 주검이 보여주는 비참한 모습이 증명한다.

박정희가 부하의 총에 맞아 죽고, 권력 공백이 생긴 틈을 노려 전두환이 다시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는 쿠데타를 두 번 일으키는데, 첫 번은 12월 12일 군부를 동원해 무력으로 정부를 뒤엎은 쿠데타고, 두 번째는 5월 18일, 광주에서 광주시민을 학살, 살육한 것이다. 12월 12일 군사반란으로 권력의 공백 상태에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일당은 전국에서 군사반란 세력에 저항하는 시위가 계속되자 끔찍한 내란 음모를 기획한다. 전두환은 경상도와 전라도 가운데 자신의 고향인 경상도를 제외하고, 김대중 대통령의 고향인 목포에서 내란을 일으키도록 기획하려 했지만, 목포는 인구가 너무 적어서 효과가 없다고 판단하고 전라남도의 중심인 광주를 선택한다.

이 내란 기획은 전두환 일당이 자신들의 폭력, 반란을 정당화하려는 목적이었으며, 전두환은 광주 시민을 학살하려는 기획안에 ‘굿 아이디어’라고 싸인을 했다. 전두환은 베트남 참전을 했고, 베트남에서도 교전했던 북베트남 민주공화국 군인은 물론, 일반 베트남 국민들도 잔인하게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렸던 자였다. 전두환은 광주시민도 베트남 국민을 잔혹하게 살해하라고 명령했다. 

전두환은 권력을 장악하고, 자신의 손으로 대장 진급을 하고, 마침내 체육관에서 대통령이 되었다. 그가 집권하던 7년은 박정희 정권 18년에서 이어지는 군부독재 25년이었으며, 전두환은 권력을 철저하게 자신의 이익을 위해 써먹었다. 전두환은 재벌에게 돈을 뜯어내는 한편, 특혜를 주었고, 자본이 권력에 종속하도록 만들었다. 자본은 피해자 행세를 했지만, 전두환 일당에게 돈을 바치고 그보다 더 큰 이익과 특혜를 가져갔다.

전두환은 자신과 그의 일당의 이익을 위해 군사반란을 일으켰고, 권력을 찬탈했으며, 광주민중을 학살하고, 이후 권력을 휘둘러 막대한 금전적 이익을 챙겼다. 철저한 권력의 사유화 사례다.

박정희, 전두환이 군사반란으로 권력을 찬탈, 사유화했다면 이명박과 박근혜의 경우는 형식적 민주주의 결과에 따른 민간 독재의 사례다. 이명박은 사기 전과 14범의 범죄자였지만, 그는 이미지 세탁을 통해 서울시장에서 대통령이 되었다. 권력을 장악한 이명박은 국민이 위임한 권력으로 자신의 이익을 위한 정책을 만들었다. 정부가 해야 하는 많은 대국민 서비스 가운데 국민의 복지를 축소하고, 토건과 건설 비중을 높여 세금이 필요 이상으로 많이 쓰이도록 만들고, 그 돈의 일부를 빼돌렸다는 의혹을 사고 있다. 외국투자를 가장해 국민 세금을 외국으로 빼돌렸다는 의혹도 받고 있다. 결국 이명박은 감옥으로 갔고, 그는 평생 감옥에서 썩어야 할 범죄를 저질렀다.

박근혜는 아버지 박정희의 후광으로 국회의원을 거쳐 대통령이 되었지만, 그의 권력을 알고 지내는 최순실에게 위임해서 국민 투표로 선출하지 않은 개인이 권력을 사유화하도록 만들었다. 박근혜는 무능의 극치를 달리는 멍청이였지만, 그의 권력을 대리한 최순실은 박근혜의 권력으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써먹었다. 결국 박근혜도, 최순실도 감옥에 갔다. 그들의 공통점은 국민이 위임한 권력이 자신의 고유한 권리라고 착각한 것이다. 그것이 오만함에 근거했든, 멍청해서 그렇든, 평균 이하의 인격인 것만큼은 분명하다.

권력의 사유화 목적은 금전적 이익을 취하려는 데 있다. 권력을 찬탈하려고 반란을 일으킨 자들이 무수한 미사여구를 내뱉지만, 그들의 결론은 물질적 부를 획득하려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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