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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건우 May 26. 2019

3 배움의 사유화

이윤의 사유화, 권력의 사유화, 배움의 사유화


이윤의 사유화, 권력의 사유화, 배움의 사유화


3 배움의 사유화


지식은 축적된 경험에서 나온다. 개인의 경험만으로는 한계가 많으므로, 한 집단을 구성하는 무리는 각자의 경험을 공유한다. 문자를 발명하기 전의 인류는 경험과 지혜가 많은 노인을 존경하고 따랐다. 오래도록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그가 많은 위험을 겪었음에도 살아남았음을 말하는 것이고, 오래 생존하는 능력은 경외와 존경의 대상이었다.

경험과 지혜가 풍부한 노인은 무리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자신의 지식, 경험, 지혜를 모두 후손에게 가르쳤다. 문자가 없었으므로 그들은 구전을 통해 대를 이어 같은 정보를 전달했고, 구전은 곧 노래가 되었고, 시가 되었다. 그리고 문자를 발명하고 그 노래와 시는 점토판, 거북껍질, 대나무, 갈대잎 등에 새겨졌다.

초기 문자는 지배자의 언어로 기록되었고, 문자는 소수 지배그룹의 전유물이었다. 문자를 쓰고 해독하는 것은 특권이었으며, 지배계급은 문자를 독점하고, 민중은 문자에서 소외되었다. 문자를 사용하지 않던 오랜 시기-고대 이전까지의 인류-와 문자를 만들어 사용했지만, 일부 지배세력만 특권으로 사용하던 시기-점토문자부터 활판 인쇄가 발명되기 전까지-는 이성과 합리가 지배하던 시기가 아니었다. 인간의 합리성은 기존 질서에 대한 회의와 의심 그리고 호기심에서 출발한다. 인류가 진화할 수 있었던 것은 몇 가지로 단정할 수 없는 많은 요소-직립보행, 도구의 사용, 불 이용, 집단화, 유아화 등-들의 결합에서 기인한 것이지만, 수만 년 전 인류가 깬석기에서 간석기로 발전한 것만을 두고 봐도 그것은 혁명적 변화, 발전이었다.

돌과 돌을 부딪쳐 깨뜨려 날카로운 면을 쓰던 인류가 돌을 갈아서 이전보다 훨씬 정교하고 날카롭고, 작은 도구를 만들게 되면서 식량 채집, 수렵이 더 쉬우면서 많이 수확할 수 있었다. 이렇게 새로운 기술을 발견, 발명한 소수의 인류는 자기가 알게 된 정보를 곧바로 같은 무리에게 전파했다. 이런 이타적 행위는 작은 단위의 무리가 안전하고 건강하게 생존해야 자신도 그렇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배움은 누구도 사유화를 생각하지 않았고, 모든 것을 공유하고 평등하게 나누던 시기였다.

지식의 사유화는 ‘지식의 전문화’, ‘지식의 세분화’와 관련 있다. 잉여생산물의 발생으로 모든 사람이 일하지 않고도 일부-무리의 우두머리 그룹-는 잉여생산물로 먹고 살 수 있게 되었고, 식량 생산에 모든 사람이 투입되지 않고, 일부는 다른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권력의 발생, 계급의 분화, 지식의 전문화는 식량으로 대표하는 물질적 토대 위에서 발생했고, 권력자와 지식인은 지배계급으로 분리되어 특권을 누리기 시작했다.

권력에 부역하는 지식인을 ‘어용’이라고 칭한 것은, 그들의 존재가 민중의 이익보다는 권력의 이익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근대 민주주의 이전 시기까지 지식인은 거의 모두 ‘어용’이었다. 민주주의-다수 민중이 주인인 체제-개념이 없던 때의 민중은 무지하고 어리석은 ‘다중’에 불과했으며, 가르치고 이끌어야 하는 낮은 수준과 차원의 군중에 불과했다.

지식과 정보의 보편화를 두고 두 가지 시각이 있는데, 하나는 지배자의 시각이고, 하나는 민중의 시각이다. 세계 최초의 목판과 활판은 모두 고려에서 나왔다. 이 시기 인쇄술의 발달은 지배계급에 봉사하는 데 그쳤다. 어느 시기에 새로운 문물이 발견, 발명되었을 때, 역사가는 그 시대를 통치하던 지배 권력의 능력이거나 그의 지도력이거나, 그의 선한 의지의 결과라고 해석한다. 전형적이고 전통적인 지배계급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역사다.

반면, 그 시기의 새로운 변화를 추동하는 것은 기층 민중의 역량이 성장하면서 분출하는 시대적 필연성으로 해석하는 민중의 시각이 있다. 이 양쪽의 극단에서 변증법적 변화가 일어날 것이고, 두 계급-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이해가 화학적 반응을 일으키며 사회는 변화, 발전하게 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조선에서 지배 문자는 중국에서 도입한 ‘한문’이었다. 그보다 훨씬 전, 삼국시대 이전인 위만조선과 한사군이 설치되면서 한문이 도입되었고, 이후 향찰과 이두가 쓰였으나 공식 문서와 경전은 순수한 한문으로만 기록했다. 문자의 예속은 곧 정신과 사상의 예속을 필연으로 드러낸다. 


지식인은 집단이 축적한 경험과 지식, 지혜의 열매를 먹고 자란 사람이다. 그가 지식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의 노력도 분명 있지만, 사회적 토양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어느 집단이든 수백, 수천년의 축적되어 온 그 집단의 지식과 경험이 사회 체제를 구성하고 있고, 개인은 그 사회가 만든 규범과 질서 속에서 살아간다.

우리는 ‘장인’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의 능력이 만든 물건을 감사하며 사용한다. 적어도 중세까지 ‘장인’은 한 사람의 인생을 들인 숙련과 노력의 결과로 탄생한다는 것을 인정했다. 자본주의가 본격화하면서 포드 시스템이 도입되고, 기계가 인간의 노동을 대신하면서 ‘장인’의 존재는 축소되었고, 사회적 인정도 약해졌다. 대부분의 노동은 단순, 반복, 일부에 국한되었고, 기계가 인간 노동의 영역을 대신하기 시작하면서, 노동자는 일차적으로 노동에서 소외된 이후 이제 그 노동의 효용성 조차 인정받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다.

지식인은 공장노동자와 달리 지식을 체득하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길다. 중세의 ‘장인’이 도제 방식으로 십 년, 그 이상의 시간을 철저한 훈련을 통해 ‘마이스터’로 성장하는 것처럼, 지식인의 성장 역시 일종의 도제 시스템으로 볼 수 있다. 이미 2천년 전에도 학문을 하려는 사람은 비싼 수업료를 지불하며 유명한 스승 아래로 들어가 스승과 함께 생활하며 공부했다. 소크라테스가 그랬고, 피타고라스가 그랬으며 공자가 그러했다. 이런 도제 방식은 학문을 연마하는 것이 ‘장인’이 되는 것처럼 오랜 시간 속에서 정신과 마음을 ‘갈고닦아야’ 한다는 단순하면서도 확실한 교육 체계를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지식인이 탄생하는 과정은 학문을 시작한 본인이 재능과 노력에 따라 차이가 있겠으나, 지식인을 키워내는 사회의 지원과 누적한 학문의 결과물이 결정적 역할을 한다. 하지만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의 결과인 잉여가치를 자본가가 독점하는 방식인 것처럼, 자본주의 체제에서 지식인 교육은 교육의 결과물을 사유화하도록 강요한다.

어느 시대나 비슷하지만, 근대의 교육은 사회주의의 경우 체제에 복무하도록 하는 이념적 성격이 강하고, 자본주의는 자본의 이윤에 복무하는 적정한 지식을 배우도록 설계되었다. 즉 우리가 배우는 초중고대학교의 커리큘럼은 그 체제를 살아가는 시민이 알아야 할 기본 교양이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 지식은 체제 유지를 위해 선택된 정보를 가공한 것으로, 권력과 자본의 의도가 개입된 것임을 전제한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자본가는 권력과 결탁해 자본의 이익에 복무할 수 있는 지식을 받아들이도록 교육한다. 다만 교육의 성격과 특성에 따라 자본주의 내부에서도 자본의 본질을 파헤치고 드러내 비판하는 학문을 배울 수 있지만, 그것으로 생존하는 지식인은 극히 드물다.

유치원부터 체제와 자본의 논리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성장한 사람은 자연스럽게 그 체제를 공기처럼 흡입하고 몸에 익숙하게 된다. 대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내재한 심각한 결함과 부정적 요소들은 교묘히 은폐되는데, 대부분은 학교에서 배우지 않기 때문이며, 비판적 시각을 가졌다 해도, 체제와 자본의 강력한 권력 앞에서 개인은 무기력하다.

체제 순응적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직업을 갖고 노동자가 되며, 일부가 지식인으로 편입한다. 지식인의 과정은 사무직 노동자가 되는 것보다 더 오랜 시간과 노력과 비용이 들어가기 때문에 지식인의 대우 역시 사무직 노동자보다 나아야 하는데, 꼭 그렇지는 않다.

사무직, 전문직 노동자들도 재벌, 대기업의 정규직 노동자가 되면 빠르게 중산층으로 편입할 수 있는 혜택을 받는다. 지식인 또는 지식노동자는 더 이상 도제 방식으로 성장하지 않고, 공교육과 사교육 제도에서 대량 생산되기 때문에 가치가 낮아진다. 대학에서 석사, 박사 과정이 지식인이 되는 과정인 것은 분명하지만, 현재의 대학원은 취업준비생의 경력쌓기용으로 전락한 지 오래고, 학문에 전념하려는 예비 지식인이라도 경쟁이 치열해 이 과정을 마치고 지식인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다. 지식노동자는 자신이 배운 지식을 일정한 가격으로 환산해 판매한다. 지식도 하나의 상품이므로 화페와 교환, 판매할 수 있다. 이때 지식 시장에서 수요가 많으면 비싼 가격에 판매할 수 있지만, 경쟁자가 많으면 지식 상품의 가격은 낮아진다. 자본주의에서 상품의 효용가치 분포와 같은 곡선을 그린다.

한국처럼 제도와 시스템에 문제가 있는 집단에서는 지식인이 아니면서도 권한 이상의 권력을 갖게 되는 경우가 있다. 한국에서 지식인으로 성장하는 방식은 정규교육이 체제와 제도를 갖추고 있지만, 특별한 경우, 한꺼번에 여러 개의 사다리를 한 번에 뛰어오를 수 있는 제도도 갖고 있다. 지금은 폐지되었지만, 최근까지 ‘사법시험’을 비롯한 모든 공무원 시험은 학력에 차별을 두지 않는다. 이런 제도는 한편으로 평등한 정책으로 옹호할 수 있으나, 책만 읽고 외워서 합격하면 평생 우월한 지위와 특권을 누리고 산다는 점에서 과정의 불합리를 말할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식이 사유화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지식을 배워가는 과정에서 개인이 투자해야 하는 비용이 크기 때문이다. 근대국가는 국민을 위해 공교육 제도를 마련했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국가와 자본이 서로의 이해에 맞는 커리큘럼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공교육에서 정부가 개인에게 학비의 일부를 지원하는 것은 복지 서비스의 하나로, 자본의 이해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일정 과정-한국에서는 최근 중학교까지 의무교육이었다가 고등학교까지 의무교육으로 바뀐다-의 학습이 필요한 것은, 노동 시장으로 진출하는 청년 노동자들이 노동자로 일하면서 기본으로 갖추어야 할 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교육만으로는 노동 시장에 진입하는 것이 어려울 만큼 노동 시장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경쟁에서 앞서가기 위해 단위 가족은 학생에게 사교육비를 투입한다. 사교육 시장은 연간 20조에 이를 만큼 거대하고, 사교육이 공교육에 직접 영향을 끼칠 만큼 위협이 되었지만, 공교육은 사교육 시장에 어떠한 대처도 하지 못한다. 사교육은 철저한 자본의 논리로 움직이고 있고, 막대한 이윤이 오가는 시장이기 때문이다.

지식인-또는 사이비 지식인-이 갖는 두 가지 착각은 이런 과정을 통해 형성된다. 지식을 배우는 과정에서 자신이 들인 노력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한다. 즉 교수가 되거나 사법고시에 합격하는 과정에서 누구의 도움도 없이 자신의 노력과 능력만으로 그 자리에 올랐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투입한 막대한 교육비-공교육비와 사교육비-를 자기의 부모가 모두 부담했다고 믿는다. 따라서 이 두 가지의 추론을 통해 지식인이 된 자신의 입지는 오로지 자신만이 누려야 할 권리이자 특권이라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이런 논리는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자본주의가 바라는 바는 가족의 해체, 공동체의 파괴, 개인의 파편화, 노동의 소외, 이윤의 독점이다. 자본이 이런 현상을 원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만든다기 보다는, 자본의 속성이 이런 필연을 만든다고 봐야 한다. 즉,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이윤의 극대화를 위해 개인을 최대한 착취하려 하고, 착취를 위한 작동기제가 가족의 해체, 파편화, 실업예비군(실업자)의 일정 비율 유지 등이다. 따라서 노동 시장은 매우 격렬한 경쟁이 유지되고, 이 경쟁에서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려면 사교육을 통해 더 많은 지식을 더 빨리 쌓아야 한다. 이런 과정을 밟아 전문가, 지식인이 되거나 권력을 갖게 된 개인은 자신의 ‘자본’-지식-을 사유화한다. 즉, 자신의 지식으로 얻게 되는 이익을 독점하려 하는 것이다.

대학교수, 화가, 작가, 기자, 의사, 검사, 판사 등 전문직 지식인은 자신의 지식을 상품으로 보유하며 높은 값으로 판매하는데, 이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건 우리가 자본주의 체제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강의를 하거나, 작품을 만들거나, 책을 쓰거나, 사회적 특권이 보장되는 직업-판사, 검사, 의사, 교수 등-을 선택하면서 자신의 지식을 상품으로 만들거나 활용해서 이익을 가져간다.

전문직 지식인이라 해도 국가가 비용을 지불하고 교육한 경우-국립교육기관에서 장학생으로-그렇게 탄생하는 전문직 지식인은 국가가 지정하는 공공서비스에서 일정 기간 복무해야 한다. 쿠바가 대표적인 사례다. 이럴 경우 전문직 지식인은 영리 활동을 하지 못하므로 큰돈을 벌 수는 없지만, 국민을 위해 자신의 지식을 공유한다는 보람을 갖는다.

대학교수, 변호사, 검사, 판사, 의사, 기자 같은 전문직 지식인이 사회에서 특별한 대우를 받는 것은, 그들이 사회에 끼치는 영향에 비례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이 정당하다거나 옳다는 말은 아니다. 형식은 다르지만, 환경미화원이나 가정주부도 전문직 지식인 못지않은 사회적 영향력이 있다. 다만, 자본주의 체제에서 그런 효용가치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할 뿐이다.

전문직 지식인이 되면 사회적 지위, 경제적 능력이 상류층으로 향할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에, 이들은 경쟁에서 앞선 자신의 능력에 자부심을 갖는다. 하지만 이들의 직업이 다른 직업보다 우월하다는 증거는 없으므로, 이것은 어디까지나 사회적 합의-라고 말하지만, 권력과 자본의 담합과 시장 경쟁의 원리-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 우리 사회가 환경미화원과 가정주부에게 더 중요한 사회적 의미를 부여하고, 그들에게 더 많은 임금을 지급하는 것 역시 사회적 합의로 가능하다.

많은 정치인 가운데 전문직 지식인이 많은 것은 그들이 정치계에 진입하는 문턱이 상대적으로 낮기 때문이며, 정치가로 변신하면 더 많은 이익을 차지할 수 있다는 사회적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즉 신분 이동을 통해 경제적 이익과 권력을 확대하려는 이들의 의도는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전문 지식을 사적 이익을 위해 활용할 수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지식을 사유화하는 지식인을 더 이상 만들지 않으려면 배움의 과정을 공공화해야 한다. 모든 교육은 정부가 예산으로 지원하고-곧, 국민이 낸 세금이다-고등학교 이상의 고급 교육을 희망하는 사람은, 반드시 일정 기간-10년 이상-정부가 지정한 곳에서 자신이 받은 혜택-교육비와 지식-을 사회에 환원하도록 해야 한다. 한편으로, 고급 교육-대학 이상-을 받지 않은 다수의 청년들이 받는 임금과 고급 교육을 받은 지식인의 임금 격차가 최대 3배 이상을 넘지 않아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두드러지는 것은, 사회의 기본이 되는 규칙이 없기 때문이다. 법률이 존재하는데 왠 규칙이냐고 하겠지만, 법률에서 자본가와 노동자의 임금이 최대 10배 이하여야 한다는 조항은 없다. 자본주의는 자본가가 주인인 세상이고, 자본가에게 유리하도록 법을 만든다. 그리고 그 법을 만드는 자들이 바로 지식인들이고, 지식인은 자본가가 나눠주는 이윤의 일부를 가져가기 때문에, 자본가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이다. 모든 단위 사업장의 노동조합과 산별노조에서 자본가와 협상해 자본가와 노동자의 임금이 최대 10배를 넘지 못한다는 규칙을 만들지 않는 이상, 미국처럼 파산 직전에 있는 기업이라도 회장은 일년에 천억원의 돈을 가져가고, 노동자는 5천만원을 가져가는 기괴한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한국에도 어떤 항공사 회장이 불법을 저지르고도 퇴직하면서 최대 5천억원의 퇴직금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 회사의 노동자는 심각한 직업병에 시달리면서도 연봉이 몇천만 원에 불과했다. 

의사는 한 달 월급이 어지간한 중소기업 노동자의 일년치 연봉에 해당한다. 판사나 검사로 일하다 변호사가 되면, 자문료라는 명목으로 한 달에 일억 원씩 받는 세상이다. 그들은 분명 전문지식인들이고, 자기가 배운 지식을 바탕으로 막대한 이윤을 창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누구의 이익에 복무하고 있는가는 명확하다. 전문지식인은 자신이 배운 지식을 자기 자신을 위해 사유화하기도 하지만, 자본가의 사적 이익을 위해 복무한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에서 정권은 몇 년마다 바뀌지만, 자본가는 망하지 않는 한, 자본가가 죽기까지 바뀌지 않는다. 그리고 자본은 대를 이어 세습할 수 있으며, 자본의 세습에 대해 누구도 비난하지 않는다. 자본의 힘이 강해질수록, 자본은 사회의 상층부-지식인 계층, 부르주아-를 매수한다. 지식을 사유화한 전문지식인은 이런 자본의 매수에 쉽게 넘어가고, 그들은 자본의 이익에 봉사한다. 우리는 사회의 심각한 구조적 문제가 무엇인지 알고 있지만, 비틀린 현상을 바로 잡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체제는 공고하고, 사람들은 파편처럼 흩어져 있으며, 무엇보다 ‘자본’과 ‘지식’과 ‘권력’이 없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를 장악한 자들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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