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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건우 Jun 05. 2019

지하철 풍경

누가 기생충인가

지하철 풍경


출퇴근을 지하철로 한다. ‘지하철에서 나는 냄새'로 계급을 분류하는 ‘박사장'의 말을 들은 뒤로, 한국 사람의 약 70% 가량이 지하철과 버스로 출퇴근을 할텐데, 그 냄새가 부르주아에게는 ‘피하고 싶은', ‘상대하고 싶지 않은' 지저분한 사람들이라는 인식이라는 걸 알고는 새삼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어느 사회든 다수에 속하는 것이 유리하고 편하다. 소수는 양쪽-가장 위, 가장 아래-에 포진해 있으며 증오와 동정의 대상으로 나뉜다. 가장 아래 속하는 소수자는 장애인, 독거노인, 소년가장 등 사회의 보호를 받아야 할 사람들이고, 증오의 대상은 ‘박사장' 같은 사람들이다. 박사장은 똑똑한 벤처기업가로, 정직하게 돈을 벌었는데, 왜? 그가 증오의 대상이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겠다. 그 사람은 선량하고 성실한 ‘개인'일 수 있지만, 그가 ‘자본가'가 되는 순간,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의 존재가 갖는 원죄가 있다는 걸 많은 사람들이 망각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박사장'을 ‘스티브 잡스'로 바꿔도 좋다. 스티브 잡스는 뛰어난 창의력과 상상력으로 세상에 없는 물건을 만들었다. 그는 공학적 기능이 전혀 없었고, 창고에서 사업을 시작할 때, 모든 제품은 스티븐 워즈니악이 다 만들었지만, 세상의 찬사는 스티브 잡스가 차지했다.

세상에 없던 물건을 만들었다고 그가 선지자이자 앞서가는 벤처기업가로 칭송만 받는 건 아무래도 이상하다. 그가 애플을 진두지휘할 때도 이미 중국의 애플 공장에서는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 문제가 심각했고, 자살하는 노동자가 속출했다. 하지만 이런 노동 문제를 제기할 때, 스티브 잡스를 비난하는 사람은 거의 본 적이 없다.

지하철에 사람이 많아서, 나는 가방을 아래로 내려 손으로 잡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서 사람들을 구경했다. 거의 모두-98% 정도-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건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스마트폰에서 무언가를 검색하고, SNS의 내용을 읽고, 문자나 카톡을 보내고, 게임을 한다. ‘문명의 이기는 활용하는데 의의가 있다’는 말을 나는 70년대 중반, 같이 일하던 형에게 들었다. 그때 ‘문명의 이기'는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 정도였다. 

지금 사람들은 손바닥에 들어오는 작은 기계를 백만 원을 들여 구입하고, 그 기계를 쓰는 대가를 매월 지불하고 있다. 기계값, 통신비 등의 명목으로 적게는 2-3만원에서 많게는 10만원에 이르는 돈을 대기업 통신사에 지불한다.

권력을 가진 자(소수 집단)가 가장 바라는 것은 파편화된 개인들이다. 70년대 박정희는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두려워해서 거리에서 서너 명만 모여 있어도 경찰이 사람들을 쫓아버리곤 했다. 게다가 북한처럼 5호 담당제를 두어 한 사람이 다섯 가구를 감시하고, 밀고하는 제도까지 만들었다. 사람들이 모이고, 뭉치는 것이 독재자에게는 가장 큰 두려움이었다.

‘분리 정책'은 식민지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개인의 파편화는 오히려 자연스럽게 성공하고 있다. 60-70년대 산업화를 거치면서 대가족은 핵가족으로 바뀌었고, 기술문명의 결과로 핵가족은 다시 1인 가족으로 바뀌고 있다. 예전에는 한 가족-4인 기준-에서 가장(아버지 또는 엄마)이 혼자 벌어도 네 명이 먹고 살았지만, ‘여성의 사회진출'이라는 명목과 여성들 스스로 사회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기 위한 노력의 결과로 여성 노동자의 비중이 커지고, 일자리도 많아지면서 노동시장은 남성중심 노동이 여성노동자와 경쟁하는 모습이 되었다. 자본은 여성노동자를 남성노동자에 비해 낮은 생산성을 보인다고해서 상대적으로 임금을 낮게 책정했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이라는 법적 강제는 거의 사문화되었고, 여성노동자는 상대적으로 저임금과 낮은 지위에서 악전고투를 하고 있다.

자본이 바라는 이상적 사회는, 모든 사람들이 개인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출산은 인공수정을 통해 적정한 인구를 유지하도록 하고, 공장은 가능한 한 모두 자동화하며, 노동자는 노동시장에서 치열한 경쟁을 통해 저임금을 유지, 고착하고, 산업예비군(실업자)는 일정 비율 존재하도록 강제해 노동자들이 자본에 저항할 수 없도록 만든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모두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고요하게 앉거나 서 있는 ‘지하철 냄새 나는' 나를 포함한 저 많은 사람들은, 대자본이 만든 ‘문명의 이기' 스마트폰을 들고, 역시 대기업 포털이 제공하는 뉴스나 드라마나, 동영상이나 게임을 보면서 출퇴근을 하고 있다. 사람들은 거의 로봇처럼 움직이고, 현실보다는 사이버 공간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더 많이 관심과 시간을 보내고 있다.

연예인들의 시시콜콜한 이야기와 드라마 주인공들의 비현실적 사랑과, 게임 캐릭터에 몰입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문제를 명확히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자본은 더 많은 돈을 벌고, 자본가는 더 부자가 된다.

그렇다고 ‘지하철 냄새 나는' 우리가 자본이 바라는대로 마냥 파편화되거나, 개인화, 개별화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멍청하고 역겨운 허수아비 대통령을 쫓아냈고, 연인원 1천6백만 명이 광장에 모여 촛불을 들었다. 이것 역시 대자본이 만들어 파는 비싼 스마트폰을 통해 퍼져나갔고, 파편화된 사람들은 불의에 항거하기 위해 현실 세계에서 뭉쳤다. 

자본이 바라는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 바로 ‘시민의 역동성'이다. 많은 부분은 자본이 바라는 세상이다. 70% 넘는 시민들이 대기업과 중소기업에서 임금을 받으며 일하고 있고, 일자리를 잃을까 늘 전전긍긍하고, 저임금에 시달리고, 비정규직과 아르바이트를 하는 미성년 노동자의 숫자도 꾸준히 늘고 있다. 노동시장의 경쟁은 너무 치열해서 사교육비를 많이 투입해 유명한 대학에 입학해도 취업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대학은 취업학원처럼 바뀌었고, 대학을 수익사업을 하는 기업처럼 운영하며, 심지어 대기업이 대학을 인수하기도 한다. 모든 것은 자본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고, 자본은 권력도 매수하거나 협조하도록 만든다.

사람들은 평소 자본의 노예로 살아가지만, 거대한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끼면, 자발적으로 행동한다. 그리고 자본이 제공한 첨단 기기는 시민들이 단결하고 뭉칠 수 있는 중요한 도구로 변한다. 우리가 믿을 것은 ‘시민의 역동성'이다. 잔잔해 보여도, 쓰나미는 거대한 높이로 저 멀리서 다가온다. 자본이 착취의 단맛을 즐기는 동안, 시민의 저항은 쓰나미처럼 몰려오는 날이 머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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