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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건우 Jun 06. 2019

인간의 스펙트럼


인간의 스펙트럼


내가 누군가를 부러워했던 기억은 소년노동자로 일할 때였다. 우리집은 물난리로 쫄딱 망해서 누나가 살고 있는 산비탈 판자촌으로 이사했고, 나는 그곳에서 몇몇 공장을 전전하다 건설일용직노동자가 되었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으니 세상물정은 전혀 모르는 무지렁이였다. 변두리 동네에서 여의도, 잠실의 아파트 공사를 하러 다니려면 하루 서너 시간도 못 자고 출근과 퇴근에 서너 시간을 보내고-그때는 전철도 없었고, 버스를 서너번씩 갈아타고도 걸어다녀야 했다-하루 12시간의 노동을 해서 잠을 자고 일어나면 베개가 코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면역력이 급격하게 떨어져 편도가 심하게 부어 침도 삼키지 못하게 되면, 동네 의원에서 마취도 하지 않고 의사가 메스로 곪은 부위를 찢어 피고름을 빼주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지방 공사를 하러 갔을 때, 그때의 그 기쁨은 이루 표현하기 어렵다. 공사현장에서 가까운 곳에 하숙집을 얻어 출퇴근을 했는데,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하숙집은 내 집처럼 편안했고, 하루 세 끼의 식사는 태어나서 그렇게 맛있고 푸짐하게 먹은 적이 처음이었다. 하루 12시간 노동을 하고도 시간이 남았다. 빨래를 하고, 바느질을 하고도 시간이 남아서 기타도 배우고, 책도 읽을 수 있었다. 무려 책이라니. 나는 삼중당문고를 한 권씩 사모으며 지방 공사를 할 때마다 꾸준히 읽었고, 나중에는 삼중당문고에서 발행한 문고본은 거의 다 읽을 정도가 되었다.

지방 공사에 내려간 동료-라고하기에는 전부 나보다 나이가 많아서 형들이었다. 하지만 경력은 내가 조금 앞서 있었다-형들은 서울 공사현장에서 우연히 만난 형들이었는데, 오야지가 같아서 지방에도 함께 내려와 생활했다. 우연의 일치지만, 내게는 운명적인 우연이었던 것이, 그 두 명의 형들은 모두 서울이 고향이었고,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며, 지금은 생활이 어려워 공사장에서 일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괜찮은 집에서 살았던 형들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나는 천둥벌거숭이로 세상에 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상식도 없었으며, 예절도 몰랐다. 두 명의 형들은 내게 형이자 부모의 롤모델이 되었다. 한 명은 아버지, 한 명은 엄마의 모델이었는데, 두 형의 성격이 또한 그랬다. 자상하면서도 엄격한 형은 유한공고-지금의 유한공전-자동차과를 졸업한, 스마트한 형이었고, 인문계 고등학교를 졸업한 형은 부잣집 아들이어서 자유롭고 편안한 성격이었다. ‘노가다’ 현장에서 이런 형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덕분에 나는 바느질도 배우고, 기타 치는 요령도 배웠으며, 사회성을 익힐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도 나는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고, 편안하게 생각한다.

두 형은 부잣집 아들들이 아니었지만, 너그럽고, 따뜻한 인성으로 나를 이끌어주었다. 나는 두 형들이 부러웠다. 어떻게 하면 저렇게 따뜻한 인성을 지닐 수 있을까, 궁금했고 신기했다.

하지만 나는 그 뒤로 나이들면서 두 형처럼 따뜻한 인성을 지닌 인간이 되지 못했다. 나는 몹시 강퍅하고, 성마르며, 날카롭고, 독단이 심하고, 편견에 사로잡힌 인간이 되었다. 이제 생각하면, 어린 내가 왜 그렇게 공격적인 들개처럼 살았는가 짐작하는 면이 있다. 내 부모는 한국전쟁이 만든 기형적 가족의 하나였다. 아버지는 북쪽에서 내려왔고, 어머니는 남쪽에서 올라왔다. 서울은 복마전이었고, 아내가 있었던 아버지는 아내를 -이유를 알 수 없지만-버리고, 어머니는 남편의 외도로 남편과 딸 하나를 버리고 따로 떨어져 나왔다가 누군가의 주선으로 만났다. 12살 차이가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는 살림을 차렸고, 나와 내 동생이 태어났다.

우리는 도시빈민으로 살았고, 평생을 고생한 어머니를 보며 자랐다. 육성회비는 늘 낼 수 없었고, 도시락을 싸가지 못하는 날이 부지기수였다. 부모는 부부싸움을 했고, 아버지는 집을 나갔으며, 엄마는 방에 연탄불을 피우고 다같이 죽자고 협박했다. 어린 나와 동생은 겁에 질려 질식할 것만 같았다. 그렇게 소년기가 지나가지도 못하고 소년노동자가 되었다.

내가 처음 만난 세상은 폭력이 일상이었다. 공장이든, 공사장이든 대부분 남성들이었다. 그들은 담배 피우고, 술 마시고, 입에 쌍욕을 달고 다녔다. 그들은 배우지 못하고, 가난한 노동자들이었지만, 자신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은 전혀 하지 않았다. 지방 공사장을 떠돌다보면 깨끗한 하숙집에서 생활할 때도 있지만, 더 많은 경우는 공사장 안에 허름한 숙소를 짓고, 단체 생활을 할 때가 있다. 수십 명이 한 공간에서 생활하면 사람들의 면면이 보이는데, 선데이서울이라도 책을 읽는 사람은 가뭄에 콩나는 것보다 찾기 어려웠다.

하루 일과가 끝나면 함바집에서 술을 마시거나, 숙소 한쪽에 몰려서 도박을 하는 것이 그들의 일상이었다. 그들에게서는 배울 점이 전혀 없었다. 나는 처음부터 담배와 술이 끌리지 않았다. 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끝까지 배우지 않은 건, 내 의지라기 보다는, 그냥 체질에 맞지 않았기 때문인데, 지금도 늘 내가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것과 술을 거의 마시지 못하는 것을 대견하게 생각한다.

나는 학교에 다니지는 못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성장하고 있다고 느꼈다. 거의 매일 삼중당문고를 읽었고, 일기를 썼다. 저녁마다 벌어지는 도박판에 끼지 않았고-딱 한 번 도박 자리에 끼었다가 형에게 혼나고 나서는 다시는 도박을 하지 않았다- 기타를 배웠으며, 아침, 저녁으로 음악(팝송)을 들었다.

약 4년 정도, 나는 전국의 공사장을 전전하며 많은 사람들과 함께 생활했다. 아주 드물게 훌륭한 인성을 지난 형을 만난 적도 있었지만, 99%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노가다꾼’들이었다. 그들은 돈이 생기면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도박을 했다. 자기 삶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내가 충격을 받은 것은 공사현장에서 만난 사람들이 아니라, 독서회에서 만난 사람에게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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