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건우 Nov 20. 2019

‘엄마’, 욕망하는 여자

만화평론

‘엄마’, 욕망하는 여자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분명 누군가의 ‘엄마들’이지만, ‘엄마’는 이들의 정체성이 아니다. 이들의 자식들은 이미 장성해서 자신의 삶을 살고 있거나, 남편과 이혼(또는 사별)해서 따로 살고 있는 여성들이다. ‘엄마’와 ‘어머니’는 같은 기혼 여성 가운데 자식을 둔 여성을 지칭하지만, 의미는 다르다. 마영신 작가는 왜 ‘어머니’여야 할 자신의 어머니와 어머니의 친구들을 ‘엄마들’이라고 했을까. 작가는 남성이고, 자신이 바라보는 ‘엄마’는 ‘어머니’이고 싶지 않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엄마들’은 작가가 ‘아들’이자 ‘남성’의 시각을 투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엄마’는 남성(아들)의 시각에서, 늘 자기를 보살피고, 다정하고, 욕구-먹고, 입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뒷바라지 하는 모든 것-를 해소해 주는 존재로 인식되어 있다. ‘어머니’는 보다 형식적이면서 존재가 분명한 이성(理性)적 대상으로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식이 나이 들어도 여전히 ‘엄마’로 부르려는 것은 단순한 친밀감의 표현이 아니라(그렇다 해도), 그들이 어렸을 때 받았던 조건 없는 사랑을 기억하고, 그리워하기 때문에, 그런 감정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의 표현이다.

하지만 ‘엄마’도 인간이고, 여성이다. 엄마도 나이 들면서 변하고, 달라진다. ‘엄마’는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면서 이타적으로 행동한 존재이며, 사회는 ‘엄마’에 대한 고정된 이미지를 퍼뜨려, ‘엄마’의 역할을 고정한다. 이것은 분명한 사회적 억압이다. ‘엄마’의 역할을 고정하려는 사회적 의도와 압력은 곧 여성 일반의 사회적 역할을 고정하고 억압하려는 가부장제, 남성 우월주의의 연장선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영신 작가는 ‘엄마들’이라는 감성적 제목과는 완전히 다른 ‘엄마’이자 욕망하는 여자의 모습을 그린다. 이 작품은 표지부터 남다르다. 작가가 자기 작품의 의도를 드러내는 가장 분명하고 좋은 방법은 표지그림인데, 이렇게 드라마틱하고 '한국적'인 표지그림은 이 작품이 아마도 최초가 아닐까. 표지그림은 그 자체로 역설이다. '엄마들'이라는 단어는 사람들에게 보편으로 인식된 '엄마'라는 따뜻하고 편안하며 행복한 이미지의 추상이지만, 그 아래 두 중년 여성이 서로 머리칼을 움켜쥐고 악을 쓰는 모습은 '엄마'라는 기존의 아름다운 추상적 이미지를 산산이 깨뜨리는 역할을 한다. 바탕의 빨강색은 중년들이 좋아하는 색깔로 알려졌는데, 빨강의 강렬한 색감과 흑백의 인물이 강조되면서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예사롭지 않은 사연을 풀어놓을 거라는 기대를 일으킨다.

주인공은 이소연이다. 중년의 여성이고, 아직 독립하지 않은 성인 아들과 함께 사는데, 자기 이름으로 남은 유일한 재산은 연립주택 가운데 한 채다. 소연은 스무 살에 중매로 남편을 만났고, 아이를 셋이나 낳아 길렀지만, 남편이 도박에 빠져 집안을 망치고 빚만 늘어나자 소연은 빚을 갚기 위해 평생 가난과 노동에 허덕였다. 그러다 결국 이혼을 하고 지금은 건물 청소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간다.

집안을 망치고, 가족을 괴롭힌 것은 남성(남편)인데, 그 문제를 해결하려 고생하는 것은 여성(아내)이 되는 구조는 ‘사회적 스톡홀름 신드롬’에 해당한다. 가부장사회, 남성 우월주의 사회에서 여성은 인질로 잡혀 있는 상태다. 여성은 늘 자신이 억압당하는 상태에 있음을 느끼고, 성폭행, 성추행, 폭행, 차별, 억압 같은 공포를 겪지 않기 위해 자발적으로 남성(사회)의 요구에 동의, 동조하는 경향을 보인다. 소연 역시 사랑하지도 않는 남편이 진 빚을 갚기 위해 자신의 평생을 힘겨운 노동으로 보냈다. 이런 여성의 행동을 가부장 사회에서는 ‘현모양처’라는 이데올로기로 포장한다. 이런 장치를 통해 여성의 욕망은 소거되고, 지배 이데올로기에 길들여진다.

소연에게는 애인 종석이 있는데 술집 웨이터로 일하는 남자다. 종석의 아내는 다단계에 빠져 빚이 많은 데다 종석의 동창하고 불륜 관계여서 사실상 이혼한 상태로 생각하고 있다. 소연은 애인인 종석이 3년 전부터 꽃집 여자를 만난다는 말을 듣고는 종석에게 욕을 하며 헤어지지만, 이들의 삼각관계는 이어진다. 꽃집 여자 명희는 소연에게 종석과 헤어지라고 말하고, 소연은 '내 남자와 연락하지 말라'고 카톡을 하다 새벽에 길거리에서 만나 육탄전을 벌인다.

작품 속 엄마들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여성이고,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려는 사람이다. '엄마'라는 이름에 가려진 그녀들의 모습은 여성으로 살아오면서 겪은 사회적 약자, 가부장제, 남성 우월주의 체제 속에서 억눌린 채 기를 펴지 못하고 살아야 했던 피억압자의 모습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엄마들은 대개 부자도 아니지만, 많이 배우지 못한 여성들이어서 자기들의 삶이 왜, 어떻게 망가져 왔는지 깊이 성찰할 능력은 없다. 남자(남편을 포함한 애인까지)들이 저지른 일을 뒤치다꺼리하느라 몸과 마음이 다 망가지면서도 자신보다 남자, 자식을 먼저 생각하며 살았던 여성이 바로 '엄마'다.

하지만 '엄마'도 나이 들면서 자기 욕망을 감추거나 숨기지 않고 살아가려 한다. 오랜 시간 너무나 많이 참았고, 남자(남편과 애인)와 아이들에게 시달렸고, 자신의 행복을 유예했다는 걸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춤을 배우고, 나이트클럽과 콜라텍에서 낯선 남자들과 춤을 추고, 애인을 사귀고, 삼각관계에서 질투와 싸움을 마다하지 않는다.

'엄마들'의 다른 모습은 '여성 노동자'다. 그것도 비정규직의 불안한 위치에서 다른 사람들이 하지 않는 더럽고 힘든 일을 한다. 소연은 빌딩 청소를 하는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그곳에는 소연과 비슷한 나이와 처지에 있는 여성들이 함께 일하고 있고, 일자리가 불안정한 용역업체의 비정규 노동자들이다.

여성 노동자로 빌딩 청소를 하는 ‘엄마’는 그들이 집에서 살림하며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했던 바로 그 모습을 빌딩 청소라는 다른 형태로 반복하고 있다. 즉, 여성 노동자로서, 엄마로서 가정과 사회에서 그들의 처지는 늘 낮은 곳, 가장 열악한 곳, 가장 힘들고, 대우받지 못하는 처지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구조적으로 억압 상태에 놓여 있는 여성 노동자이자 ‘엄마들’은 자신의 처지를 개선하기 위해 개인적으로 욕망을 발산하고, 사회적으로 노동조합을 건설한다.

자신들의 처지를 개선해 달라고 소장을 찾아가 이야기를 한 옥자 언니는 성추행을 당하고 해고된다. 옥자 언니는 여성가족부도 찾아가고 노동운동을 하는 여성도 찾아가지만, 실질적 도움을 받지 못한다.

하지만 이들이 노조를 만들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용역업체 소장-남성-은 반장을 시켜 어용노조를 만들도록 하고, 16명 가운데 12명이 어용노조에 가입하고, 4명이 된 소연과 동료들은 따돌림을 당한다. 함께 일하는 동료(여성)들이 어용노조의 그늘 속으로 들어가 자기들만 고용의 안정을 도모하는 것을 보면서 소연과 동료들은 배신감을 갖지만, 12명의 여성이 왜 권력의 그늘로 순순히 들어갔는가에 대한 문제의식은 드러나지 않는다. 동료와의 연대까지 외면하면서 더 중요한 건 ‘일자리’고 ‘임금’이기 때문이다. 빈곤은 동료 노동자와의 연대와 협력을 방해한다. 일자리를 잃게 되면 곧바로 들이닥치는 생존 문제는 이들이 노동착취와 차별에 저항하지 못하는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한다.

소연은 라디오 방송에 나가 일하는 회사에서 부당 노동행위가 벌어지고 있다고 고발한다. 라디오 방송의 파급 효과가 있어 소장은 소연을 비롯해 모두 해고될 거라고 협박하지만 결과는 용역업체와 소장이 바뀌고 일하던 사람들은 모두 그대로 남았는데, 소연과 연정 언니는 해고된다. 소연은 옥자 언니와 다른 업체에서 일하게 되는데, 그곳에 예전 업체에서 반장을 했던 사람이 들어온다. 떡값을 빼돌리다 들통나서 해고되자 우연히 소연이 일하는 곳으로 취업한 것이다.

소연은 삼각관계였던 명희와 친구가 되고, 연순은 만남 어플로 연하의 남자를 만나고, 명옥이는 기자 애인과 계속 만나고, 연정은 마트에서 일을 시작하고, 경아의 남편은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모두 여전히 자기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들은 사회를 개혁할 여력도, 능력도 없지만,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살아간다.


* 이 글은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공모한 만화평론에 가작 당선한 저의 글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룸펜 프롤레타리아, 욕망의 리얼리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