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궂다.
이런날 아이들은 꼭 날궂이를 했다.
창 밖에는 3월과 어울리지 않게 우중충한 날씨에 비가 쏟아붓고 있었다.
찌뿌둥하게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고 습관처럼 핸드폰 어플로 날씨를 확인하는 마루는
우산과 비모양의 그림을 확인하고 한숨부터 길게 내쉴 수 밖에 없었다.
'아, 오늘 하루도 정신 없겠군'
사실 마루는 비오는 날을 굉장히 좋아했다. 평소에도 좋아하는게 많은 마루였지만
'비오는날'은 마루가 좋아하는 것들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것 중 하나였다.
비가 고인 바닥에 불빛이 비쳐 유독 화려해 보이는 도시 풍경도, 비오는 날의 냄새도,
특유의 우울해서 툭 건드리면 눈물이 날 것 같은 감성도 좋아했다.
하지만 그건 마루가 오롯이 혼자 시간을 보낼 수 있을 때의 일이었다.
유치원에서 아이들과 함께 비오는날을 보낸다는건 여간 힘든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런날은 카페에서 좋아하는 음악들으면서 커피한잔 마시면 딱인데'
낮은 기압 때문인지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 부터가 고역인 것 같았다.
-도담반 교실-
귀를 찌르는 아이들의 고성, 평소보다 흥분된 아이들의 몸짓과 억양들,
장난감이며 옷들이며 모든 물건들을 교실 바닥으로 쏟아놓으며 저지레 하는 아이들-
발바닥이 교실에서 5cm정도는 떠있는 것 같이 붕붕 떠다니는 아이들.
마루는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양쪽 관자놀이를 꾸욱- 눌렀다.
두통이 오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럴 줄 알았지'
사실, 비오는날이 아니더라도 유독 교실 분위기가 어수선하거나
아이들이 묘하게 흥분되어 있는 날들이 있었다.
초임, 아니 저경력 시절-
아이들의 흥분을 가라앉히고 교실을 다시 차분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잔소리를 하며 스트레스를 받던 날들이 있었다.
평소보다 즐거운 마음에 친구들과 더 재미있게 노는 것 뿐인데 잔소리를 들어야 하는 아이들이나,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분위기를 가라앉히려고 무던히도 애쓰는 마루나
모두에게 스트레스일 뿐인 날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마루는 노하우가 쌓일대로 쌓인 고참 교사였다.
이런날은 딱 하나, 하나의 마음가짐만 있으면 아이들도 마루도 편할 수 있었다.
'이런 날도 있는거다.'
사실, 이런 마음을 가질 수 있었던건 오래 되지 않은 사건 때문이었다.
비가 오던 어느날-
원래 궂은 날들이 그렇듯 교실은 엉망이었고,
더 방방 뜨는 아이들과 그런 분위기를 차분하게 만들려고 무던히도 애쓰는
마루 사이의 팽팽한 전쟁이 이어지던 시간이었다.
'아, 제발 비좀 안왔으면 좋겠네. 날씨가 왜 이런거야 도대체!!!'
속으로 투덜거리던 마루는, 어느순간 뒷통수를 맞은 것 처럼 소름이 돋았다.
마루는 아침까지만 해도 비오는날의 반짝이는 풍경을 마음껏 감상하며, 좋아하는 비냄새를 맡으며,
비와 어울리는 노래를 들으며 기분좋게 출근 했었다.
그런데 지금, 불과 몇시간 전까지만 해도 좋아했던 것이 끔찍하게 싫어지는 순간을 마주한 것이다.
좋아하는 이유를 수십가지도 댈 수 있을 정도로 비오는 날을 좋아하던 마루였다.
비가오면 꼭 듣는 플레이리스트가 있고, 비가오면 꼭 보는 영화가 있을 정도로 비오는날을 좋아했었는데....
좋아하는 걸 잃는 순간을 실시간으로 겪을때의 충격은 생각보다 컸다.
순간, 마루는 아이들이 저지레 해놓은 장난감을 줍는 것을 멈추고,
뛰지 말라고- 걸어다니라고 하던 잔소리를 멈추고 멍하니 교실을 둘러보았다.
교실 구석구석, 아이들 하나하나를 눈에 담기 시작했다.
'별거 아니구나'
음소거를 한 듯 소음과 자신을 분리한채-
어수선한 이 공간에서 동떨어진, 마치 마루 혼자 다른 공간에 있는 것 처럼
천천히 교실을 관찰하던 마루는 마침내 한가지 생각에 다다랐다..
'평소보다 아이들 목소리 조금 더 큰게, 평소보다 조금 더 뛰어다니는게,
평소보다 장난감 조금 더 어지르는게 뭐. 그게 뭐 어때서'
'그래, 이런 날도 있는거지'
이런 날을, 이런 순간을 인정하기로 하자 갑자기 마루의 마음이 평온해 졌다.
정신없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교실 속에서 거친 파도가 몰아치던 마루의 마음 속이,
바람 한 점 없이- 그래서 다리미로 편 듯 물결조차 일지 않는 고요한 바다가 된 것이었다.
오늘도 토독토독 창문을 때리며 비가 내리고 있었다.
교실은 여전히 어수선하고 시끄럽고, 흥분 상태였지만 오늘 마루의 마음은 평온했다.
저쪽을 보니,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창밖의 빗속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양말도 혼자 신기 힘들고, 옷의 지퍼도 혼자 채우기 힘들며, 아직도 집에서는 밥을 떠먹여주는게 익숙하지만, 비오는날의 감성은 느낄 수 있는 인생 4년차 아이들이었다.
마루는 아이들 옆으로 가서 아이들이 바라보는 곳으로 시선을 두었다.
"너희는 뭐 보고있어?"
"선샘미, 밖에 비가와요"
"선샘미, 비가 언제까지 와요?"
"엄마가 내일도 비온대요"
아이들은 마루와 같은 풍경을 보며 각자 자기의 말을 하고 있었다.
"그래, 우리 다음에는 비오는날 다같이 우산들고 나가볼까?"
"좋아요! 밖에 나가봐요."
"저는 집에 우비도 있어요"
진심이었다.
그렇게나 좋아하는 만큼 그렇게나 힘든 비오는 날이지만,
이제는 아이들과 우산을 들고 빗 속으로 뛰어들어 보고 싶기도 했다.
아이들도 비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마루만큼 아이들도 비오는 날을 좋아해서 평소보다 신이나나 보다.
'그래, 좋아하는걸 계속 좋아하고 싶다면, 방법을 찾아야지.
좋아하는걸 쉽게 포기하지 말고- 계속 좋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자'
비가오는 오늘.
역시나 마루는 정신이 없었고, 머리는 아팠으며, 교실분위기는 엉망진창 그 자체였다.
아이들은 신이 났고, 평소보다 말을 안듣는 탓에 데시벨을 올려 말하느라 목소리는 나가버렸다.
그럼에도 마루는 비오는 오늘하루를 좋아할 수 있었다.
수업을 마치고 연수실로 돌아온 마루는
치열했던 교실을 뒤로하고 평소보다 차분한 마음으로 창밖의 비를 즐기며 커피를 마실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