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는 누가 준다해도 안가져갈 가방을 손이 아플정도로 쥐고있었다.
이미 공항을 빠져나와 호주 시내에 들어선 후였다.
혜지와 마루는 마천루같이 높이 들어선 빌딩과, 한블럭만 더 가면 오래된 문화재같은 건물들이 공존하는
호주의 도시 광경에 쉴새없이 눈이 돌아갔다.
숙소에서 체크인을 한 후, 짐을 풀며 마루가 입을 열었다.
"헤지야. 우리 이제 어떡하지?"
"뭘 어떻게해?"
"나는 여기 오면 뭐가 해결될줄 알았는데, 진짜 그냥 오기만 했어. 이제 뭐부터 하면 돼?"
"일단 일자리부터 알아봐야지"
"아니, 그러니까. 그 일자리를 어디서 어떻게 알아보냐고"
".....?"
"....??"
"!!!!"
마루와 혜지는 허공에서 눈을 마주쳤고, 둘은 서로의 눈빛에서 '아...망했다'라는 사인을 읽을 수 있었다.
"뭐, 여기오면 벼룩시장이라도 있는 줄 안거야? 신문 구인광고 보고 일일이 전화 돌려보게?"
한동안 말없이 심란하게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있을 때, 짐정리를 하느라 열어놓은 문 밖에서 소리가 났다.
옆방에서 이제 막 이곳을 떠나려는 건지 큰 트렁크를 들고 누가봐도 '한.국.사.람.'이라고
얼굴에 쓰여있는 한 여자가 길을 나서고 있었다.
여자는 떠나려다 말고 활짝 열어놓은 문 안으로 보이는 마루와 혜지에게 말을 걸어왔다.
"오늘 호주 오셨나봐요?"
행색만 보고도 호주에 머물렀던 사람인지, 방금 도착한 사람인지 알아보는것을 보니,
타지생활 짬밥이 있는 사람 같았다.
"네, 방금 도착했어요."
"워킹홀리데이?"
"네"
"일은 구했어요?"
"아니요.
우리는 호주에 오면 눈앞에 뭐가 저절로 나타나는줄 알았는데, 갑자기 막막해졌어요."
"일단, 일이 필요하면 OOO로 가요. 거기가면 지금 당장 영어가 안돼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요"
다음날, 낯선나라에 도착한지 하루만에-
오늘은 또 호주 속의 낯선 호주에 도착해 있었다.
무슨 용기인지 마루와 혜지는 처음보는 여자의 말 한마디에만 의지한 채,
당장 그녀가 알려준 곳으로 가는 기차표를 끊었다.
그땐 마루와 혜지는 알 수 없었다.
훗날 호주생활을 돌아봤을때, 그녀가 얼마나 귀인이었는지.
타지에 도착한 첫날 만난, 알 수 없는 여자의 말 한마디 덕분에 이곳에서 얼마나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재미있는 일을 겪고, 어려운 일을 겪어내고, 얼마나 많은 경험을 할 수 있었는지.
막막함과 우연한 행운이 동시에 존재했던 호주생활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호주에 오기 전 마루의 상상속 호주생활은 환상과도 같았다.
낮에는 어느 한 식당에서 힘들지 않게 아르바이트를 하고, 오후에는 어학원을 다니면서
외국인 친구들을 사귀는 모습.
가끔 외국인 친구들과 펍에도 가고, 파티에도 초대받으며 20대의 젊은날을 아름답고 찬란하게,
그리고 무엇보다 핫하게 보내는 모습.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환상보다 더 환상같아서 오히려 '지금, 꿈을 꾸는건가-' 싶기도 했다.
방금까지 농장에서 일을 하느라 흙을 한바가지 뒤집어쓰고 돌아온 마루는,
샤워를 하면 붉은 물이 되어 흘러내리는 모래와 흙을 씻어내야 했다.
샤워를 마치고 화장실에서 나오면서 마찬가지로 방금 일을 끝내고 돌아오는 혜지와 마주쳤다.
혜지도 물론 흙을 뒤집어 쓴 모습이었다.
둘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마주보다가 헛웃음을 터뜨려 버렸다.
"혜지야, 얼른 씻고나와. 우리 이 앞에서 맥주나 마시자"
숙소 앞 펍에 도착한 마루와 혜지는 각자 맥주 한잔씩을 앞에 놓고 앉았다.
둘 모두 맥주컵을 들 힘조차 없어보였다.
"혜지야, 괜찮아?"
"뭐가?"
"오늘 괜찮았나 해서."
"괜찮을리가 있냐. 온몸이 쑤셔 죽겠다"
"그러게. 내가 생각했던건, 이런모습은 아니었는데"
"그래서? 마루 너는 한국 돌아가게?"
"아니, 절대 안돌아가지. 절대!"
"그렇게 힘들어하면서 한국에는 왜 절대 안돌아가려는건데?"
"여기가 좋아. 아무것도 없잖아.
뭘 해야하는지, 앞으로 뭘 할 수 있는지 걱정할 것도 없고.
가족들이 뭘 원하는지, 내 적성이 어떤지 다 따져가며 고민해볼 일도 없고.
그냥 하루하루 눈앞에 있는 흙먼지만 뒤집어쓰면 되니까.
그게 좋아."
멋모르고 도착한 땅덩어리에서 처음해보는 일들을 하며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생활을 하고 있는
마루와 혜지였지만, 그 자체로 즐거웠다.
한국에서 하던 고민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눈앞에서 보이지 않는 곳으로 잠시 미뤄 놓았을 뿐이었지만
생활의 단순함이 주는, 그래서 복잡하게 생각을 이어가지 않아도 되는 환경이 좋았다.
"그리고, 이제 진짜 어른이 된 것 같은 느낌도 들어.
누구도 아니고, 내가 나를 책임져 주고 있잖아."
호주생활이 주는 행복 안에는 '독립'이라는 단어가 주는 자유도 한몫 했다.
온전히 나의 생활을 책임져 보는 경험.
내가 번 돈으로 나의 생활을 꾸려나가야 한다는 책임과 자유가 마루와 혜지에게 뿌듯함을 넘어선,
이미 스무살이 넘은지 한참이 지났지만 이제서야 진짜 어른이 된 것 같은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 후는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도 모를정도로 빠르게 흘러갔다.
뜻하지 않은 행운과, 예상밖의 방향으로 시작된 워킹홀리데이는
이제 마루의 인생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시간들이 되어가고 있었다.
처음으로 사귀어 본 외국인 친구들.
꼭 언어가 통해야 친해질 수 있는게 아니라, 몸짓, 발짓, 눈빛, 표정으로도
소통이 되고 마음이 연결될 수 있다는 걸 알려준 소중한 인연들.
지구가 이렇게나 넓고, 가봐야 할 곳이 이렇게나 많구나를 느끼게 해준 여행들 까지...
무엇보다 마루의 인생 이정표가 된 것 같은 한마디를 이 시간에 배울 수 있었다.
" 아, xx!!!!!!!!!!!xx힘들다!!! 진짜 한국가면 못할 일이 없다!"
살인적인 뙤약볕 밑에서 흙과 함께 뒹굴며 일하면서 매일 하던 생각이
이제는 마루의 인생 지침이 되어 있었다.
'이세상에 내가 못할일은 없다!
한번 사는 인생,
해볼 수 있는 미친짓은 다 해보자!'
되고싶어서, 하고싶어서 시작한 일은 아니었지만 아이들이 좋았다.
대학 졸업 후 사립을 다니던 초임 시절.
열악한 환경에서 아이들을 위한 종이한장 마저 내돈으로 사야했던 때-
주말마다 문구점이며, 다이소를 돌아다니며 물건을 쓸어담는 마루를 보고 혜지는 말했었다.
"마루야, 지금 너 진짜 멋있어"
마루가 의아한 얼굴로 혜지를 쳐다보자 말을 이었다.
"물건 하나하나 고르면서, 이걸로 뭐할까- 애들은 이걸 좋아할까 고르는 모습이 멋있다고.
주말에 내시간, 내돈까지 써가면서 준비하는데, 너 눈이 반짝반짝 거려.
내친구지만 존경해"
가끔, 마루는 그시절이 떠오르곤 했다.
농장에서 힘든 일을 하면서, 속으로 육두문자와 함께 내가 못할일은 이세상에 없다!!를 외치던 때를-
원해서 시작한 일이 아님에도 초임시절 친구에게 낯간지러운 말을 들을정도로
아이들을 생각했던 때를-
치열하게 고민도 해보고 낯선 곳으로 도망도 가보며, 돌고돌아 지금의 자리에 온 마루였다.
비록 되고 깊은 것이 너무 많아서, 되고 싶은 것이 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마루는 지금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