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쌤~ 보고싶었어요!!"
"주아쌤~ 잘 지냈어요?"
주아가 카페에 들어서며 마루를 발견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두 사람의 얼굴과 눈빛에는 반가움이 가득했다.
5월.
카페 밖은 눈이 부시게 화창했고 살랑이는 바람 한 번에, 길거리에 내리쬐는 햇빛 하나에
마음과 기분이 둥둥 떠다니는 계절이었다.
알록달록해지는 나무와 피어나는 꽃을 시샘하며 불어오는 찬바람이 물러가고,
그자리를 은은하고 뜨끈한 더위가 채워가는 계절-
5월은 마루에게는 한학기의 반이 지나갔다는 안도감과,
이제 곧 여름방학을 향한 카운트다운을 시작할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다가오는 시기였다.
그와 동시에 새로운 아이들, 학부모, 동료교사에게 적응을 마치고 한숨 돌릴 수 있는 여유가 생기는 시기였다.
물론 이런 마음의 여유와는 별개로 행정업무와 원내행사는 빼곡하게 마루의 다이어리를 채우고 있었다.
마루와 주아는 두사람 사이에 놓인 커피를 한모금씩 마셨다.
"주아쌤. 벌써 5월이에요. 시간이 정말 말도 안되게 흘러가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요. 마지막에 본게 2월이니까, 벌써 3달만에 보는거네요."
시간은 상대적인 거라지만 유독 마루에게는 빠르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나이가 들수록, 경력이 쌓일수록, 일에 익숙해질수록 가속도가 붙는 느낌이었다.
"새해를 1월이 아니라 3월에 새학기와 함께 시작해서 그런지, 1년이 더 짧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우리는 한달 단위로 살잖아요.
3월은 <유치원과 나>, 4월은 <봄>, 5월은 <나와가족>.
생활주제별로 한달씩 끊어서 사니까 더 빠르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맞네. 벌써 <나와 가족> 할 시기네요."
유치원에서는 매달 생활주제를 중심으로 놀이와 배움이 진행 되었다.
5월은 가정의 달인 만큼 대부분의 유치원이 '나와 가족'을 주제로 다루고 있었다.
"주아쌤은 이번에 나와 가족으로 어떤 활동 할꺼에요? 좋은거 있으면 알려줘요."
"생각해 놓은건 많은데, 요즘에는 하도 가족이 다양하다 보니까...
고민되는 부분이 많아요."
"그러게요. 민감하게 고려해야 하는 부분이 많은 주제이긴 해요."
"한부모 가정, 다문화 가정, 조부모 가정...어떻게 풀어갈지 조금 고민중이에요."
"나와 가족 하니까, 우리 신설에 있을 때 생각 나네요. 빌리 기억나요?"
"아, 당연히 생각나지요. 오랜만에 듣네요."
"선생님. 나 이거 안먹어"
빌리의 말에 슬아는 당황했다.
빌리는 항상 반말을 했다.
빌리는 중동의 아랍권에서 온 다문화 가정의 아이였다.
눈을 한번 깜빡일 때마다 오랜 시간이 걸리게 하는 속눈썹과,
말그대로 바둑알 같이 새까만 눈동자를 가진 아이였다.
슬아의 반이었던 빌리는 말을 안듣는 아이 중 한명이었고, 슬아는 그런 빌리를 힘들어 했었다.
"마루쌤. 빌리가 오늘도 친구를 때렸어요."
수업을 마치고 연수실에 들어온 슬아는 빌리의 아빠에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맞은 상대 아이의 학부모에게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이 한가득 이었다.
"그러게요. 친구들이랑 잘 어울릴 수 있어야 할텐데 말이에요."
"아니, 마루쌤. 빌리 한국말 잘하는거 알아요?
친구들한테 말하는거 들어보면 엄청 잘한단 말이에요?!
그런데 꼭 제가 혼내면 못알아 듣는 척을 해서 큰일이에요..."
7살이면 생김새가 다르고 사용하는 언어가 다름을 인지하는 시기였다.
그럼에도 잘 어울리려면 슬아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빌리의 의지도 필요했다.
슬아는 친구와 좀처럼 어울리지 못하고, 항상 슬아의 주의를 끄는 빌리가 걱정이었다.
지금은 교사가 내내 빌리와 함께 교실에 있지만,
곧 학교에 올라가면 아무래도 지금보다 선생님의 손길이 덜 갈 수밖에 없을 터였다.
'학교 문제가 다 뭐냐...지금 눈앞에 있는 문제부터 해결해자'
슬아는 마음을 굳게 먹고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지루하고 끈질기게 울리는 통화연결음이,
오늘도 빌리의 아빠와는 통화가 어렵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슬아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같은 번호를 눌렀다.
다시 길고 긴 통화연결음 끝에 빌리 아빠의 목소리가 들렸다.
"헬로?"
영어로 전화를 받은 빌리 아빠의 목소리에 슬아는 한국말로 응답했다.
"안녕하세요. 여기 별빛 유치원 샛별반이에요. 빌리 아버님 맞으시지요?"
"예쓰!"
"통화 가능하실까요?"
질문의 대답이 채 들리기 전에 슬아는 오늘 오전에 있었던 빌리와 친구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빌리 아빠는 가만히 듣고 있었다.
한국말에 서툴었지만 이정도의 간단한 이야기는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빌리. 오늘. 내가 집에서 얘기할게"
다행이었다.
천천히, 요점이 되는 "빌리. 친구. 싸웠다. 때렸다." 등의 단어를 끊어서 말해서인지
대충의 눈치로 알아들은 것 같았다.
사실, 학기초에는 빌리의 엄마와 이야기를 더 많이 했었다.
빌리의 엄마는 한국말도 곧잘 했었고, 슬아는 그래도 언어가 통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던 어느날 빌리가 슬아에게 와서 말했다.
"엄마. 비행기 타고. 엄마나라 갔어."
슬아는 마음이 쓰였다.
그나마 한국말을 하는 엄마 덕분에 한국에서의 생활이 조금 편했을 빌리였다.
엄마 덕분에 앞으로 한국말도 더 배울 수 있었을 빌리였고,
슬아도 빌리에 대해서 지금보다 편하게 얘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모든 상담을 한국말이 더 서툰 아빠와 해야 했고,
엄마의 몫까지 한국말을 자신이 더 가르쳐 줘야 한다는 책임감이 일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사건이 터졌다.
빌리의 방과후 선생님이 씩씩대며 연수실로 들어온 것이었다.
"아니, 빌리아빠 너무 한거 아니에요??"
격앙된 목소리로 연수실 문을 세차게 열어젖히며 들어오는 바람에 모든 시선이 방과후 강사에게 쏟아졌다.
슬아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가며 물었다.
"선생님! 무슨일이에요?"
"아니, 빌리아빠 말이에요. 해도 너무 하잖아요."
슬아와 선생님들이 방과후과정 강사의 말을 들어주러 다같이 다가갔다.
"아니, 우리는 언제 퇴근하라는거에요?
유치원이 7시까진데, 매일 늦어요. 왜 안오냐고 연락하면 이렇게 문자가 와요."
'오늘. 늦는다. 지금 간다. 유치원'
방과후과정 강사는 기가 막히다는 듯이 헛웃음을 지으며 문자를 보여줬다.
슬아를 비롯한 선생님들은 웃을일이 아님에도 웃음이 나왔다.
방과후 선생님도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덕분에 분위기가 풀어졌지만, 해결해 나가야 하는 문제였다.
슬아가 방과후강사의 기분을 풀어주려 어깨를 주무르며 달래듯이 말했다.
"선생님~ 제가 빌리 아빠한테 다시한번 잘 얘기 해볼게요"
그리고 그날.
전화로는 안될 것 같은 슬아는 빌리의 아빠를 기다리기 위해 퇴근도 미루고 연수실에 남았다.
'딩동'
빌리를 데리러 아빠가 왔을때, 슬아가 빌리를 인계하며 다시 한번 얘기했다.
"아버님. 우리 유치원은 7시까지 운영해요. 시간을 지켜주세요."
빌리 아빠는 슬아를 보며 말했다.
"나 바쁘다. 빌리. 늦게 데리러 온다."
"아버님, 그래도 유치원이 정해진 운영 시간이 있어서..."
"7시. 못온다."
슬아는 지지 않고 말했다.
"우리 유치원! 7시까지! 한다!
7시! 문 닫는다! 나도! 우리아이! 집에서! 기다린다!"
빌리 아빠는 순간 조용해졌다.
그리고 그날이 빌리를 늦게 데리러 온 마지막 날이었다.
"그때 슬아쌤 진짜 대단했어요"
마루는 웃으며 지난 날을 회상했다.
"맞아요. 그날 이후로 빌리 아빠 한번도 늦지 않고 잘 데리러 왔었잖아요."
주아도 같은 기억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주아와 마루 사이에 놓여진 커피가 어느새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