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은 장식이에요?"
마루가 들은 말 중 가장 충격적이고 예의없는 말 중 하나였다.
심지어 길을 가다가, 혹은 모르는 사람에게 들은 말도 아니었다.
마루가 두 귀로 직접 들은 이 말은 같이 일하는 원감 한테서 들었던 말이었다.
면전에서 똑똑히 듣고도 제가 잘못 들은건 아닌지 한동안 멍- 때려야 했던 마루였다.
십여년 전 까지만 해도 유치원에는 갑질이 만연했다.
학부모 갑질도 있었지만, 원장이나 원감이 꼬라지를 부리는 갑질도 만만치 않았다.
문제는 갑질을 하는 사람도, 당하는 사람도 그게 갑질인지 몰랐다는 것이었다.
첫 발령으로 신설유치원에 근무하던 때, 가장 최악의 원감- 아니, 최악의 인간을 겪었던 마루였다.
면전에 대고 저런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아니 배설하는 원감과는
더욱 잊을 수 없는 최악의 일화도 있었다.
연수실에서 바쁜업무를 보던 중 친정엄마에게 급하게 전화가 걸려왔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이었다.
울고있는 엄마의 목소리에, 마지막으로 봤던 병실 속 할머니의 모습이 겹치면서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는 느낌이었다.
떨리는 마음과 목소리를 억지로 누르고, 원감을 찾아가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원감님. 방금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연락을 받았어요."
원감은 마루의 말에 고개도 들지 않고 보고있던 모니터만 응시하며 대답했다.
"3일"
"...네?"
마루는 당황했다.
"친가랑 외가랑 경조사 휴가 다른건 알지?
외할머니라고 했지? 외가는 경조사 휴가로 3일 쓸 수 있다고"
온몸의 힘이 다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화가 나는건지, 황당한거지 자신의 기분을 자신도 알기 어려운 마루였다.
허탈하다는 느낌에 더 가까울지도 몰랐다.
함께 일하는 사람의 가족 부고소식에 나온 반응이라니....
"3일"
마루는 평생 잊을 수 없는, 두고두고 되새길 이 한마디를 할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들을 수 있었다.
열이 펄펄 끓었다.
아이들도, 학부모도, 교사들도 적응하기 위해 치열해야 했던 학기초가 지나가고 있었다.
이때쯤이면 마루는 꼭 연례 행사처럼 크게 한번씩 앓았다.
온몸을 뻣뻣하게 만들던 긴장이 풀리기 시작하면서 그 자리를 몸살이 채우는 것 같았다.
'오늘은 더 못버티겠다."
조퇴를 쓰려고 막 원감님을 만나러 가던 참이었다.
그때, 옆반 지연 선생님의 실습생이 들어왔다.
오늘이 실습 마지막 날이었고 그 덕분인지 실습생은 표정이 밝았다.
마루는 침을 삼킬때마다 아픈 목을 한번 가다듬고 의례적으로 물었다.
"학생선생님, 오늘 마지막날이네요. 고생 많았어요.
우리 지연선생님한테 많이 배웠어요?"
"네. 진짜 너무 많이 배웠어요."
"우리 지연선생님이 좀 잘 하긴 하지~"
"맞아요. 그중에서도 말을 예쁘게 하는 방법을 제일 많이 배웠어요.
아이들한테도 그렇지만, 저한테도 너무 말을 예쁘게 해주셔서..."
'말을 예쁘게 한다'라-
예쁘게 말하는 법을 배웠다는 실습생의 말을 들으며 전에 함께 일하던 최악의 원감이 떠오르는 마루였다.
원감은 마루가 아는 최고의 공주님이었다.
공.포.의.주.둥.아.리.
스물스물 퍼져오는 검은 아우라의 기억때문에 열이 펄펄 끓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보는 마루였다.
힘없이 걸음을 옮길때마다 떠오르는 공포의 주둥아리와의 기억을 애써 밀어내며,
지금 함께 일하는 원감실 앞에 다다랐다.
"똑똑"
마루는 원감실 문을 열고 들어가 원감에게 말을 건넸다.
"원감님, 저 오늘 몸이 너무 안좋아서 조금 일찍 들어가봐야 할 것 같아요."
"어머! 마루 선생님. 얼굴 빛이 안좋네. 감기에요?"
"그런 것 같아요."
"나도 얼마전에 감기 걸렸었는데, 엄청 아프더라고요.
환절기라서 그런가? 얼른 들어가봐요"
어느 책에서 말했었다. 아파본 사람이 아픈사람의 마음을 잘 안다고.
하지만 내가 아파봤다고 해서 남의 아픔을 모두 공감해줄 수 있는건 아니었다.
공감이라는건 그사람의 능력이자 재능이었다.
원감의 위로아닌 위로를 듣자, 다시 공포의 주둥아리가 떠올랐다.
어느날, 아픈 마루에게 공주 원감은 말했었다.
"아플꺼면 주말에좀 아프지. 꼭 주중에 아프네. 호호."
공주 원감과, 지금 원감. 두명의 말이 메아리처럼 번갈아가면서 마루의 머리에 울려퍼졌다.
"아플꺼면 주말에좀.....꼭.....주중에..."
"나도 얼마전에....아프더라고요....얼른 들어가봐요...."
누군가는 말 한마디에 천냥 빚을 갚는다고 하지만, 누군가는 말한마디로 천냥 빚을 지기도 하는 법이었다.
조퇴를 쓰고, 짐을 챙기러 연수실에 다시 들른 마루는 문을 열자마자
학부모와 통화하고 있는 윤아 선생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어머, 어머님~ 지윤이 오늘 잘 들어갔지요...?
어머님도 잘 아시겠지만, 지윤이가 워낙 잘하잖아요~ 호호
다른게 아니라....
....맞아요...호호
....어머! 지윤이가 그러던가요???? ....
지윤이가 저를 예쁘게 봐줘서 그런가봐요....제가 더 고맙죠. 호호...."
목소리가 분홍색이었다. 말끝마다 하트가 붙어 있었다.
도레미파솔- '솔'의 음을 유지하느라 목에 핏대를 세우며 윤아는 학부모 응대를 하고 있었다.
비단, 윤아 뿐만 아니라 연수실 안의 선생님들이 학부모를 응대하는 전화를 들을 때마다
마루는 속으로 생각했다.
'인간들이 서로에게 저런 말투로만 말을 할 수 있다면 전쟁도 막을 수 있겠다.'
'친절하게 말하는걸 법으로 정해야 하나?'
'싸가지 없이 말하는걸 법으로 금지할 수는 없나?'
'아. 그럼 내가 잡혀갈 수도 있으려나?'
마루는 정작 자기자신도 가까운 사이일수록, 편한 사이일수록
오히려 말이 예쁘게 나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학부모들과 전화할때, 동료 선생님들에게 말할 때는 그렇게 세상 친절할 수가 없으면서
정작 엄마에게, 언니에게, 함께 사는 짝꿍에게는 투덜투덜 거리기도 하고 짜증도 내며,
말도 안되는 이유로 언성을 높일 때도 있는 것이었다.
정작 내가 친절해야 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가족들, 소중한 사람들인데도-
'오늘부터 나한테 우리가족은 다 학부모님이다!!!'
학부모들을 대할때처럼만 가족들을 대해보자고 다짐하는 마루였다.
그리고 지금 원감같은 선배가 되자고, 후배의 말을 경청하고 공감하고
존중해주는 사람이 되자고 다짐하는 마루였다.
'공포의 주둥아리랑 있을 때는 몸이 아픈데도 타박을 듣고 눈치보면서 아파야 했는데,
눈치안보고 마음껏 아파도 되니 좋다'
이제 아플때도 죄송해야 하는 마루는 없고, 존중받는 마루만 있었다.
10년전 공포의주둥아리와 있을 때도, 지금도 마루는 변한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옆에 누가 있는가의 차이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