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가족2

by maru

빌리는 다행히 한국말이 점차 늘기 시작했다.

언어는 어렸을 때 배워야 한다는걸 피부로 체험하며 느끼고 있는 슬아였다.

문제는 빌리가 늘어버린 한국말과, 그럼에도 아직은 또래보다 서툰 한국말을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이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마! 내꺼야! 돌려줘!"

친구에게서 장난감을 빼앗을 때에는 앙칼지게, 제법 또박또박 말했다.


"어제는 아빠랑 마트에 갔어요."

주말지낸 이야기를 할 때에는 발표하고 싶은 마음에 손도 들지 않고,

엉덩이를 들썩이며 있었던 일들을 빠르게 다다다- 내뱉는 빌리였다.


하지만 슬아가 잔소리를 할 때면 얘기가 달라졌다.


"빌리. 친구가 장난감을 빼앗으면 어떻게 해야 하지?"


빌리는 새까만 눈을 느리게 껌뻑이며 못알아듣겠다는 듯이 슬아를 바라본 뿐이었다.


"빌리. 친구를 때리면 친구가 어떨 것 같니?"


역시 고개를 오른쪽으로 살짝 기울이며 못알아듣겠다는 표정으로 슬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말로 해야돼요."

"아플 것 같아요"


등의 간단한 대답은 할 줄 아는 빌리였다.

하지만 빌리는 이럴 때마다 슬아의 말을 못알아듣겠다는 듯이 슬아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고개만 갸웃거리고는 입을 꾹 닫아버렸다.


오늘도 빌리와의 전쟁을 마치고 연수실로 돌아온 슬아는

마루에게 긴 한숨과 함께 있었던 일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방금 막 수업을 마치고 오기는 마루도 마찬가지였다.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자 마자, 채 한숨을 돌리기도 전에 쏟아내는 슬아의 푸념에

본격적으로 얘기를 들어주기 위해 자세를 고쳐잡는 마루였다.


"아니, 마루쌤 오늘은 빌리가요...."


로 시작했던 슬아의 말은


"친구를...때리는건 뭐 이제....기본..."

"우유도 그냥 안먹어요....꼭 한번씩 흔들다가 엎어야....."

"이제는 하다하다 스팽클을 삼켰어요. 그걸 왜 먹는거에요?!

수업 하다말고 원감님이랑 병원까지 다녀왔어요...도대체 왜 이렇게 말도 안되는 일들만 벌이는 걸까요!"


라는 여러가지 사건들을 줄지어 말하며 마무리 되었다.


마루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참을 슬아의 말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어 슬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슬아쌤..."


"??"


"혹시 빌리가 슬아쌤한테 관심받고 싶어서 그러는거 아닐까요?"


"...네?"


"빌리가 얼마전에 엄마하고도 헤어졌잖아요. 집에는 아빠밖에 없는데 아빠도 항상 바쁘고...

이렇게라도 슬아쌤한테 관심받고 싶은거 아닐까 해서요."


"아...정말 나한테 관심받고 싶어서 그러는거면 어떻게 해야돼요?"


"음....그러면....이렇게 하는건 어떨까요??"




슬아는 어제 마루와 했던 대화를 머리속으로 되새기며 교실로 비장하게 들어섰다.

오늘부터 빌리와의 전쟁이 시작된다.

아니, 빌리와의 전쟁을 끝내야 한다.


자유놀이 시간-

여느때와 다름없는 풍경이었다.

단 하나, 슬아가 빌리를 주시하고 있는 것만 빼고.


항상 교실 전체를 보느라, 다른 아이들과 놀아주느라, 다른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느라

빌리가 사고를 친 이후의 모습만 보게된 슬아였다.

이렇게 빌리를 자세히 관찰하기 시작하니,

슬아는 새삼 빌리가 친구를 때린 후, 장난감을 빼앗은 후의 모습만 줄곧 보아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준우야, 나 이거 자동차 하나만 빌려주면 안돼?"

"음..."

"준우 너는 자동차 세개나 있잖아. 나는 하나도 없는데..."

"음....그래! 이거 민결이 너 해!"


그때, 빌리 곁에서 놀고있던 준우가 민결이에게 장난감을 나누어 주었다.


'지금이야!'


슬아는 마루가 알려준 방법을 쓸 때가 왔다는 것을 재빨리 알아챘다.

슬아는 바로 준우와 민결이, 그리고 빌리 곁으로 다가갔다.


"어머! 지금 준우가 민결이한테 장난감 양보해 준거야?

우리 준우가 친구를 생각하는 마음이 너무 예쁘네"


지나가듯 툭- 던진 슬아의 말에 준우와 민결이 얼굴에 베시시 웃음이 피어났다.

그 때였다.

그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빌리가 가지고 있던 네개의 자동차를 빤히 보더니,

하나를 슬-쩍 민결이 앞으로 내밀었다.

민결이는 당황했다. 빌리에게는 달라고 할 생각조차 못했었다.

빌리의 처음보는 모습에 민결이는 얼굴에 물음표를 띄운채 고장난 사람처럼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고 있었다.

슬아는 놓치지 않고 다시 한 번,


"어머! 빌리도 민결이한테 장난감 나누어 주는거야?

우리 샛별반 친구들끼리 사이가 너무 좋아서 선생님이 기분이 좋다"


빌리를 향해 활짝 웃으며 말해주었다.

그리고 슬아는 처음으로 빌리의 그런 표정을 볼 수 있었다.

부끄러운 듯 발그레- 해진 얼굴을 숙이며 활짝 웃고 있는 빌리의 모습을




자유놀이가 끝난 후 정리시간-

정리가 힘든 빌리는 여전히 정리보다는 여기저기 자유롭게 돌아다니기를 선택했다.


'지금이야!'


다시 슬아는 빌리 주변을 맴돌며 열심히 정리하고 있는 준우와 민결이를 칭찬해 주었다.


"우리 샛별반 정리대장이 여기 있었구나!!

준우랑 민결이가 지나가니까, 장난감이 다 제자리로 돌아갔네."


그 말을 들은 빌리의 눈이 반짝! 하고 빛나는가 싶더니, 이내 준우와 민결이와 함께

섞여서 열심히 장난감을 제자리에 놓기 시작했다.

슬아는 이번에도 놓치지 않았다.


"빌리도, 우리 샛별반에서 정리대장 해야겠다. 벌써 다 정리됐어!"


빌리는, 아까 보여줬던 쑥스러운 듯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한번 몸을 베베 꼬았다.




그리고 그해 12월.

빌리는 더이상 슬아에게 골칫덩어리가 아니었다.

빌리는 마치 정화조 같았다.

좋은 것들을 부어주니, 나쁜 것들이 사라져 갔다.

빌리의 좋은 행동들을 칭찬해주니 점점 커져갔고, 나쁜 행동들은 점점 작아졌다.

그리고 이제, 빌리에게는 맑은 물만 남아있었다.


빌리를 졸업시키던 날.

슬아는 마루에게 물었다.


"마루쌤, 그런데 빌리가 관심 끌려고 했던거 어떻게 알았어요?"


"나도 그런 적이 있었거든요."


"?"


"예전에 바깥놀이에 나가려고 줄을 서고 있는데 한 아이만 계속 화장실 문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안나오는거에요.

아이들은 한참을 기다리고 있는데, 무슨 장난을 치고 있는지 화장실 문앞에 앉아서 꾸물대더라고요.

그래서 잔소리하려고 그애한테 다가갔는데....글쎄 어땠는줄 알아요?"


"??"


"화장실 실내화를 정리하고 있더라고요.
평소에 말썽만 부리던 친구였는데...

어느날 화장실 실내화 정리하는 친구 칭찬해주던걸 기억하고는 자기도 칭찬받고 싶었던 거에요.

그때 쭈그리고 앉아서 실내화 정리하던 그 뒷모습이 얼마나 짠-했는지.

그것도 모르고 잔소리부터 하려던 내가 너무 밉더라고요."


"아..."


슬아는 자기도 모르게 작은 탄성이 터져나왔다.


"슬아쌤.

가만히 들여다보면 아이들 행동에는 다 이유가 있어요."




주아와 헤어지고 돌아가는 길-

주아 덕분에 옛날의 기억을 꺼내어 볼 수 있었다.

까맣게 잊고있던 이름도 다시 떠올려 보고,

무의식 밑으로 가라앉아있던 옛날 일들도 다시 떠올리며 추억할 수 있었다.

어느 드라마에서 추억은 아무런 힘이 없다고 말했지만,

적어도 마루와 주아에게는 서로를 연결해주는 강한 힘이 있었다.


5월.

올해도 마루의 반에는 한부모 가정, 다문화 가정 유아가 있었다.

교사가 되고 열번째 5월을 보내며,

열번째 <나와가족>에 대해 수업을 준비하는 마루였다.



화, 목 연재
이전 17화나와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