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엄마와의 추석

by maru

추석.

어렸을 때는 이 단어가 주는 설레임이 있었다.


마루에게 추석이란 못보던 가족들도 만나고, 어른들께 용돈도받고,

맛있는 음식도 잔뜩 먹는날이었다.

큰집에 가서 오랜만에 만나는 또래 사촌들과 신나게 놀 수 있는 날.

일년에 고작 두세번 만나는 사이였지만, 그 나이 아이들이 그렇듯

어제 만난 친구처럼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어린시절에는 분명 추석이 주는 설레임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마루에게 추석이 좋은 이유는 그저 출근을 하지 않는다는 것 뿐이었다.

그마저 온전히 쉬는 것이 아닌, '며느리'라는 역할과 의무를 충실히 해야 하는 날이었다.


어렸을 때는 엄마가 불편한 시댁식구들과 둘러앉아 음식을 하는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몰랐다.

신나게 놀다가 엄마 옆에서 물고기처럼 입만 벙긋 거리면, 웃으며 하던 음식을 입에 넣어주곤 했다.

생각해보면 그때 엄마의 나이가 지금 마루의 나이보다 어렸다.


출근을 하지는 않지만 그를 대체할 만큼의 피곤이 있는 날.

어른이 된 마루에게 추석이란 어렸을 때처럼 마냥 들뜰 수만은 없는 날이 되었다.




마루는 시댁식구들과의 추석을 한바탕 치러내고 친정으로 향했다.

마루와 엄마는 맥주를 앞에두고 나란히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다른가족들은 모두 돌아가고 마루만 친정에서 하루 자고 가기로 한 날이었다.


맥주를 앞에 놓고 친정엄마와 하는 얘기란 항상 비슷했다.

어렸을 적 얘기.

마루가 얼마나 꼴통이었는지 되새길 수 있는 추억파먹기.

마루는 엄마와 공유된 추억들을 끄집어 내어 얘기하는 시간이 좋았다.


한참 이야기하던 중 문득 엄마가 마루에게 물었다.


"마루야. 너는 시간을 되돌려준다면 언제로 돌아가고싶어?"


"음...모르겠네...아마 호주 갔을때?"


"왜?"


"너무 좋았거든. 지금생각해도 잘 갔던 것 같아.

세상은 넓고 내가 못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걸 그때 알았으니까"


"또? 다른시절은 없어?"


"음....그런데 생각해보니까 그냥 아무 때로도 안돌아갈래.

그냥 좋았던 시절이지 돌아가고 싶지는 않아. 난 지금이 좋아. 엄마는?"


"나도. 나도 지금이 좋아."


"엄마는 왜?"


"지금이 제일 편안해."


최선을 다해 살아온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대화라고 생각했다.

후회없이, 남김없이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해본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대화.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그때의 나보다 열심히 살 자신이 없는 사람들의 대화.


"맞다, 요즘도 축구보러 다녀?"


"그럼! 축구는 이제 일상이야."


"뭐가 그렇게 좋아?"


"축구에는 인생이 담겨있거든."


"축구에 인생까지 담겨있어? 90분이나 앉아있으면 안힘들어? 지루 할 것 같은데"


마루가 자세를 고쳐앉으며 본격적으로 말했다.


"참...그게 인생하고 닮았다는거야. 어떤 경기는 시간가는줄 모르고 보는데, 어떤 경기는 지루하거든.

똑같은 90분인데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시간이 다르게 느껴져. 우리 인생도 똑같잖아."


덕후는 원래 좋아하는 것을 말할 때 가장 눈이 빛나는 법이었다.

마루는 전을 부치던 동태눈을 초롱초롱한 눈으로 갈아끼우고 말을 이어갔다.


"경기를 하다보면 선수들이 실수를 하거든? 분명히 실수는 항상 나와.

하지만 실수가 문제가 아니야. 중요한건 그 후의 대처지.

실수 한 번 했다고 아...망했다- 하면 그 경기는 그렇게 끝나는거고,

'지금부터 다시하면 돼!' 하면 역전할 수도 있는거고.


우리도 살면서 항상 넘어지잖아. 하지만 넘어지지 않는게 중요한게 아니야.

넘어진 후에 계속 그자리에 주저앉아 있을지, 툭툭털고 다시 일어날지 그건 내가 정하는거잖아.

인생을 끝까지 어떻게 몰고갈지는 내 마음에 달려있는거지."


엄마는 조용히 말의 말을 들어주었다.


"더 중요한건 추가시간이야.

그때가 되면 다들 지쳐있고 집중력이 떨어지거든.

그럴 때 극장골이 나오는데, 그건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사람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해.


끝날 때까지 끝난게 아니다.

마지막 휘슬이 울릴 때까지 포기하지 않으면 결과는 모르는거야.

결국 잔디 위의 선수들 마음가짐에 따라 경기는 마지막 1초 전에 달라질 수도 있는거지"


"오~ 우리딸 축구하나보면서 그런것까지 생각해?"


"그럼! 나는 축구하나를 봐도 인생을 담아서 본다고."


마루는 고개를 들며 말을 이어나갔다.


"사람들이 대부분 자기한테는 관대하고 남한테는 야박하잖아. 내로남불.

축구도 그렇더라고. 상대편이 우리한테 반칙하고 시간끌면 온갖 욕을 하면서

비매너네, 스포츠맨십이 없네 하다가도 우리팀이 똑같이하면 영리한 플레이가 되는거야."


마루는 신이나서 떠들어댔다.

오타쿠는 그런법이었다.

하나를 물어보면 10가지를 주절거리며 질문한 사람을 후회하게 만드는...


"그리고 난 이게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어떤 팀 소속인지.

내가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팀메이트가 있는지 없는지.

그 팀하고 케미가 어떤지. 주변에 서로 좋은 시너지를 줄 수 있는 동료들이 있는지.


우리도 주변에 어떤 사람을 두느냐에 따라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는지 결정될 때도 있잖아.

가족, 친구, 동료.

인생에서 누굴 만나 함께하는지가 정말 중요하거든"


신나서 떠드는 마루의 반짝이는 눈을보며 엄마는 여전히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었다.


"그래서..."


"...?"


"그래서 난 엄마를 엄마로 만난게 고마워.

내 인생에서 함께하는 사람이 엄마라서.

엄마가 내 엄마라서"


예상치 못했던 마루의 말에 엄마가 살짝 놀란눈으로 마루를 바라보았다.

축구 이야기의 마무리에 이런 감동이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한 것 같았다.

눈이 마주친 두사람은 시원하게 잔을 부딪혔다.


고단했던 추석이 맥주와 축구이야기 하나로 풀리는 저녁이었다.


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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