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아름다움에 스며든 당신 (토머스 윌머 듀잉)

초록은 누군가를 아름답게 하는 색이다. 그러한 아름다움은 회복을 가져온다

by 김수정

"아버지, 이 제품은 파랑색과 초록색이 있는데, 어떤 색으로 사다 드릴까요?

아버지는 좋아하는 색을 여쭈면 꼭 초록색을 말씀하셨다.
나는 아버지의 취향에 의문을 가지면서도 역시 어르신들은 어쩔 수 없이 고루하구나 넘기곤 했다.

내게 오랫동안 초록색은 답답하고 식상하기만 한 색이었다.
녹색은 시각적으로 편안함을 주는 색, 가장 무난한 색이라고 여겨졌기에
오랫동안 사무실이나 교실에서 활용되었다.
짙은 초록을 사용하는 칠판과, 게시판의 초록 부직포,
가끔은 짙은 초록의 페인트로 코팅된 문이나 창문의 나무 프레임 등은
오랜 시간 학교에서 머무는 내게 초록을 아름답지 못한 색으로만 이미지화하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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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내가 초록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된 계기는 어떤 영화에서 등장한 어떤 미인들 때문이다.
<위대한 유산>에서의 기네스 펠트로와 <어톤먼트>에서의 키이라 나이틀리의 신비로운 모습은
그간 닫혀 있었던 내 눈을 깨어나게 했다.
초록의 드레스를 입은 그들의 모습은 비단 나뿐 아니라 수많은 이들에게도
오래오래 잊히지 않는 모습으로 남았다.

빨강이나 검정 드레스가 보여 주는 강렬함과 다르게
초록은 그 드레스를 입은 이에게 생동감을 부어 준다.
초록은 자신이 주인공으로 나서는 색이 아니다.
초록은 어떤 누군가를 아름답게 하는 색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Thomas Wilmer Dewing

이러한 초록빛과 미인을 떠올릴 때면, 그 신비로운 아름다움이 떠오를 때면
토마스 윌머 듀잉의 초록빛 그림을 생각한다.

이 아름다움을 얻어 가기 위해 이미지의 구석구석을 샅샅이 매만진다.
이 초록을 길어내어 붓기 위해 구석구석 촉촉한 곳을 찾아 매만진다.
시들고 메마른 삶의 자리에서 일어나 초록의 아름다움에 스며들어 보기 위해 시간을 투자한다.

이 초록빛 공간 가운데 초록의 공기가 그득하다.
숲은 연한 노랑에서 연둣빛, 초록을 지나쳐 청록색의 짙은 색채를 조화롭게 드러내고,
이러한 다채로움이 생기를 돌게 한다.
여인이 내어던진 낚싯대에서는 무엇이 걸릴지 궁금하기도 하고,
낚싯대를 쳐다보는 여인의 살랑거리는 치마는 이 공간의 움직이는 대기를 상상하게 한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까지 잔잔하게 안개 낀 듯한 화면은
이 장소가 일상의 장소가 아니라 꿈과 같이 놀라운 장소라는 것을 엿보인다.

이 놀라운 장소에서는 그 어떤 답답함도 없이 모든 것이 초록의 자유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이 초록이 여인에게 그러했듯, 나 역시 이곳에서는 아름다운 누군가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이곳이라면 잠시라도 비현실적인 순간을 기약해도 좋을 것 같다.

Thomas Wilmer Dewing <In the Garden> 1892-94

'초록의 화가'로 불리는 토마스 윌머 듀잉 (Thomas Wilmer Dewing 1851-1938)
미국의 색조주의 (Tonalism) 작가이다.
어떠한 색조를 유지하면서, 이 색상의 이미지 자체가 그림의 주제가 되는 그림을 그려낸다.
실제로 듀잉은 색채를 주제로 삼았던 대표 화가, 제임스 애봇 맥닐 휘슬러와도 교류하면서
색채에 대한 영감을 주고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미국 화가들이 대개 그랬듯이 그 역시 프랑스로 유학하여 파리의 아카데미 쥴리앙에서 공부한다.
그 역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던 인상주의 작가들과의 만남을 피할 수 없었다.
화면에 어린 안개 같은 분위기는 인상주의에게서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듀잉은 4년간의 파리 유학 후 귀국하여 뉴욕 살롱계에서 활동한다.
당시 미국은 자본과 문화가 넉넉했기에 미술과 음악에 기꺼이 투자하는 분위기였다.

살롱에서의 활동 중에 그는 일생의 연분을 만난다.
6세 연상의 화가, 마리아 오키와의 결혼은 화가로서도 안심할 수 있는 결합이었다.
마리아는 토머스에게 전체적인 화면의 분위기를 좀 더 부드럽게 만들어보라는 조언을 하고,
이러한 조언은 그의 그림을 색조주의로 정착하는 데 도움이 된다.

Thomas Wilmer Dewing <Spring>

토마스 윌머 듀잉은 어려서부터 음악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듀잉의 작품에는 악기를 들고 연주하는 여인들이 많이 등장한다.
자연뿐 아니라 실내 공간에서조차 구체적인 공간감보다는 이상적인 공간감을 강조하다 보니
연주하는 여인들의 모습은 더욱더 현실감을 떨어트리고 일상에서의 존재감을 사라지게 한다.

Thomas Wilmer Dewing <The Reciation> 1891 1891

나는 토머스 윌머 듀잉이 초록색을 이상적인 공간을 표현하는 데 최적의 색으로 상정했다고 생각한다.
놀라운 것은, 초록색이야말로 풍부한 색채감을 내기 어려운 색이기 때문이다.
초록색이 갖고 있는 안료적 특성 때문인지, 초록은 다른 색과 결합해도 풍부한 색을 내기가 어렵다.
초록을 능숙하게 쓰는 화가가 아니라면 그림이 칙칙해지기 딱 좋은 색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듀잉의 작품이 더 놀라운 경험을 가져온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얻을 수 없었던 초록의 색채감을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끌어낸다.
안개가 가득한 이 넓은 초록의 공간이 초록색 본연의 아름다움을 절실하게 이끌어낸다.

Thomas Wilmer Dewing <Reading>

살다 보면 가끔 현실에서 벗어나야만 할 때가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을 잠시 쉬기도 하고, 휴대폰을 끊어버리기도 하고,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아마도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여행을 가는 것 같다.
답답한 일상을 떠나서 텅 빈 장소로 다녀온다. 그곳의 여유 있는 공기에 스미게 하였다가 돌아온다.
사실 여행은 비현실적이다. 비현실적인 장소에서 현실의 장소로 돌아오는 과정이 여행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곳으로 간다.
그저 아름다운 것을 찾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그리고 아름다운 곳에서는 회복이 가능하다.

토머스 윌머 듀잉은 이것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작가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듀잉은 그 자신이 가장 초록의 아름다움에 스며들어보았던 사람이 아니었을까?
초록의 아름다움이 선물하는 회복의 능력을 가장 잘 경험해 보았던 사람이 아니었을까?

초록은 누군가를 아름답게 하는 색이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아름다움은 누군가의 회복을 가져온다.

아름다움이 누군가를 가장 생기 있게 만들어준다는 것,
아름다움을 통해 누군가는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것,
나는 이러한 경험을 토머스 윌머 듀잉의 초록빛 그림을 통해 배웠다.

가끔은 놀라운 것이다. 이러한 아름다움이 온 세상에 가득하다는 것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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