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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정 Sep 17. 2023

온화(溫和)라는 이름의 나무

온화함의 그늘을 가꾼다

토마스 윌머 듀잉 <여름> 캔버스에 유채, 107.0 x 137.8 cm, 1980년대, 스미소니언 미국 미술관

토마스 윌머 듀잉(Thomas Wilmer Dewing, 1851~1938)은 초록을 주조색으로 하여 참 아름다운 여성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주로 한 명보다는 여러 명의 여자들이 초록의 자연 가운데, 혹은 초록의 안개 같은 실내 가운데 머뭅니다. 심히 아름다워 눈을 뗄 수는 없지만 여성의 인간적 개성이 드러나지 않음에 비판의 이야기가 들리기도 합니다. 개인의 자아가 중요한 현대사회에는 더더욱 맞지 않는 그림입니다. 

하지만 <여름>을 보는 순간 가슴에 손을 얹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저 역시 그랬습니다. 저 분위기 가운데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저 안에 들어가 저 여자들과 함께 어울리면 저런 분위기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초록은 중간(neutral) 색입니다. 빨강, 노랑, 파랑 같은 강렬한 원색이 아니라 자극이 절제된 포용의 색입니다. 노랑 같은 따뜻함과 파랑 같은 서늘함 가운데 균형을 맞추는 색입니다. 한편 초록은 생기의 색입니다. 자신이 존재함으로 타인을 주인공으로 만드는 색입니다. 온화합니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까지 꽉 찬 안개 같은 저 초록은 모든 것이 온화함이었습니다. 

저 안에 머물고 싶습니다. 


근무 시간이 끝나면 나는 마녀의 가면을 벗고 자연의 얼굴로 돌아간다. 누구나 그렇듯이 자연 그대로라 해도 하나의 얼굴만 갖고 있는 이는 없으니, 일하지 않는 시간 나의 얼굴도 달라질 것은 자명하다. 

비록 얄팍하건대, 내가 가장 마음에 들어하고 많이 쓰고 싶은 얼굴은 존재한다. 참으로 따뜻하여 화합하는 성품을 가진 온화(溫和)함의 얼굴이다. 


원숙한 여성 한 분이 어느 날 이야기해 주었다. "선생님 날개 아래 머물고 싶습니다"라며 자신을 찾아온 젊은 이의 이야기를. 많은 이야기를 듣지 않고도 나는 알 수 있었다. 왜 젊은이가 그 분에게 그리 말하였는지를. 어디에서나 온화함은 시선을 사로잡기 전 몸을 사로잡으니까. 사람의 그릇이란 그런 것이다. 저기 들어가면 충분히 마음을 놓을 수 있지 않을까. 따뜻한 곳에서 그래도 되지 않을까. 그리고 그 분은 실지로 그리 해 주고 있었다. 그 분의 가족 모두, 그녀의 아래서 평화를 얻었다. 녹록지 않은 집안에서 태어나 녹록지 않은 직장생활을 하고 녹록지 않은 관계로 살았다. 어떤 상황이던 그녀가 개입하면 평정된다. 억지의 입을 다물게 된다. 주먹이 가라앉게 된다. 그녀는 전혀 다투지 않는다. 그녀는 그곳에 존재해 준다. 첨언하자면 그 분은 장교 출신이다. 이미 수많은 다툼을 보고 느끼고 겪었으리라. 살면서 점잖지 못하게 싸우게 될 때, 나 자신이 경박하다는 느낌이 들 때 그 분의 얼굴이 떠오른다. 


안타깝게도 이 얼굴을 가진 이를 우리가 만나기는 쉽지가 않다. 참으로 본성에 잘 붙어있지 않은 성질을 가진 얼굴이므로. 온화는 인간의 본성을 심히 싫어해 귀하고 비싼 값을 제대로 한다. 


온화한 이는 포용하는 인간이다. 내 앞에 선 저 멍청이를, 애송이를, 그저 빙그레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이다. 온화한 이는 겸손한 인간이다. 내 앞에 교만한 지식인이, 가벼이 부유한 이가 있어도 마찬가지로 빙그레 웃는다. 왜인가? 그 역시 생과 다투기 전, 그러한 인간이었던 것이다. 분수를 모르고 날뛰었던, 교만하였던, 불같은 성질을 가누지 못했던, 그런 사람이었던 것. 지금도 그러한 성정을 깊은 곳에 여전히 지니고 있는 사람. 교만하여 항상 미리 자신을 쳐 복종시키지만 곧 자족할 수 있는 사람. 모순되는 속성을 하나로 포용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에게도 신뢰했던 이에게 뒤통수를 맞은 경험이 있다. 그를 어떻게 용서할 수 있냐고 가슴을 쥐어뜯으며 피눈물을 흘렸던 시간이 있었다. 그를 용서할 수 없어서 이를 갈았던 시간이 있다. 그러나 그가 몰랐던 것이 있다. 삶의 방식이 겸손하기에 온화하기에 따뜻하기에 마음의 어는점이 언젠가는 무용해질 수 있다는 것을. 용서가 가장 큰 복수이다. 그릇이 다른 사람이 된다는 건 그와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이니, 너와 나는 상종치 못할 사람이 된다는 의미가 된다. 그리하여 나는, 그에게서 자유로워지려 계속적으로 나를 용서한다. 정말 이겨냈다면, 승화했다면, 자유로워졌다면, 긴 말이 필요없다. 수식어가 필요없다.... 자유는 단순한 거다. 


자칫 유약해 보일 수 있는 부드러운 외형과 달리, 내면이 무엇보다 강하다. 흔들리지 않기에, 그저 그 자리에서 빙그레 웃는다. 그러면 그들이 다가온다. "나를 이렇게 대한 건 네가 처음이야"가 아니라, "나 역시 너의 날개 아래 머물고 싶다"라고. 시베리아 냉기처럼 차가운 이의 그늘 아래 머물고 싶은 이는 글쎄, 내가 아는 한 단 하나도 없었다. 온화함은 겸손에 뿌리박고 자라는 나무의 그늘이다. 누구라도 그 나무를 보면 멈칫, 서고야 만다.  모든 사람의 종착점은 온화한 얼굴 곁이다. 참으로 강하고 담대하다. 유연하고 따뜻하다.  


온화함은 내 그릇 안의 대기(大氣)를 결정하는 요소다. 사람의 그릇이 큰 크기를 얻으려면 땅땅 때리고 때로는 깨어지고 잇기도 하면서 여린 몸을 늘린다. 두툼하게 그릇을 바르고 보강할 시간도 물론 있다. 그러나... 좀 살만 하는가 하면 어김없이 삶은 우리의 그릇을 다시금 깡깡 때리며 싫다는 아파죽겠다는 자아와 다툰다는.... 사람은 고통을 겪은 만큼 귀해진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귀하여지기를 바라나, 고통 역시 하늘이 선택하여 내리는 것이더라. 사람의 귀천은 이렇게 정해진다. 물론 고통이나 귀함이나 그런 류의 단어는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결국 귀하게 된 사람은, 천하게 살아도 좋으니 이런 고통 겪지 않았었으면 좋았겠다 목 놓아 울었던 것이 함정. 처음부터 보다 큰 크기의 그릇으로 태어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인생 5회차'라고 부른다는,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이야기. 일본 드라마 <브러쉬 업 라이프>를 보라,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나 공덕을 쌓는 고되어 제련된 인품의 무게를. 아무나 가질 수 없다. 인품이라 함은. 


따뜻하다, 이 글자의 근본은 어질 온(昷자다. 참 아름답다 참 좋은 글자. 가장 인간의 본성에서 먼 온화함마저도 본성에서 태어난다. 이기적인 감정과 반응에 치이고 꽂히며 다치면서 자기 자리를 넓히고 결국 본성을 지배한다. 적어도 나는, 온화함이 고난한 전투 후에야 얻을 수 있는 결정이라고 믿는다.  유교에서 군자의 목표라 여겼던 수신의 결정체다. 여중군자, 숙녀의 수신 역시 같은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매일 싸운다. 매일이 전투다. 삶은 매일 빼앗기고 다시 얻는 과정 가운데 있다. 주로 빼앗긴다는 마음이 들 때가 있다. 많이 빼앗길지라도 다치더라도 결국엔 무엇을 얻어올 것인가. 진짜 품위를 가진 사람은 어떤 빼앗김에서도 이로 인한 변화에도 온화히 평정을 이룬다. 모든 것을 빼앗길지라도 온화한만큼은 잃지 않으려 기를 쓴다. 이 온기를 가질 수 있다면 아무리 처지나 위치가 달라진다 해도 높은 마음이 힘을 잃지 않을 수 있으므로. 온화함의 승자는 최고의 전투사이다. 


살면서 다치고 상처받을 수 있되 닳아 사라지지 않아야 하는 것들을 기억한다. 나는 이 온화의 얼굴을 나의 가장 가깝고도 귀한 자리에 걸어두었다. 계속 다투다보면 언젠가 낡더라도 꼭 맞는 얼굴이 될 것이다. 단언컨대, 모든 숙녀의 미래는 그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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