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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구 Nov 07. 2021

작은 도약

지면에서 잠시 뛰어오르는 순간, 점프

 한 달 정도 수업을 듣게 되자 조금씩 발레 용어들이 귀에 들어왔다. 탄듀, 글리사드, 아쌈블레. 인터넷에 이 이름들을 쳐보면 나오는 동작들과 내가 수업에서 실제로 수행해내고 있는 동작들 사이에는 꽤나 큰 간극이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평소엔 잘 쓰지 않는, 심지어 그 뜻도 제대로 모르는 프랑스 단어들이 내 일상 속에 조금씩 한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수업 시작 시간이 되자 매트에서 간단한 근력 운동을 하고 나서 학원 한쪽에 모아 세워뒀던 바를 들고 거울이 잘 보이는 자리로 옮겨왔다. 바를 두 손으로 잡고서 오른발 왼발의 뒤꿈치를 맞붙이고 허벅지와 골반을 바깥 방향으로 열어 선다. 이때 발 모양의 이름은 1번 포지션이다. 이 발 모양은 발레 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모습 중 하나여서 나는 되도록 두 발을 최대한 180도로 벌려 일직선으로 만들어 서보려고 노력했는데 맘처럼 쉽지 않았다. 


 '탄듀'는 1번 포지션, 혹은 1번에서 조금 더 두 발을 안쪽으로 겹쳐 서는 5번 포지션에서 한 다리에는 무게중심을 두고 다른 다리를 앞, 옆, 뒤로 쓸어 움직이면서 포인한 발 모양을 보여주는 동작이다. 그런데 옆으로 탄듀를 할 때는 정말 내 몸의 90도 양 옆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다.

 선생님이 1번 포지션 발 모양을 만들 때 러시아 발레리나들처럼 무리하게 양 발 사이의 각도를 일직선으로 벌리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각도만큼의 발 모양을 만들었을 때, 그때 내 엄지발가락이 향하고 있는 곳. 바로 그게 내가 만들 수 있는 탄듀의 옆 동작 방향이었다. 겉으로 보이는 모양을 흉내 내는 게 아니라, 내 몸이 할 수 있는 만큼의 움직임, 내 몸이 만들 수 있는 움직임을 만들어가는 게 중요했다.


 바에서의 동작이 끝나면 다시 바를 한쪽으로 옮겨 모아 두고, 센터에 모여서 선생님이 알려주시는 동작을 따라 하며 배운다. 이 날은 수업을 듣는 학생들을 두 조로 나눠서 글리사드와 아쌈블레 연결 동작을 연습했다. 글리사드와 아쌈블레는 모두 점프 동작이다. 몸의 중심을 왼쪽, 오른쪽으로 옮기는 글리사드를 하고 나서 옆으로 총총총 걸어가 앞으로 다리를 뻗어냈다 다시 모으며 아쌈블레를 했다.


 선생님의 시범을 볼 땐 쉬워 보이지만 막상 직접 해보면 다들 생각처럼 몸이 잘 따라주지는 않는다. 선생님의 능숙한 동작을 뒤따라서 다들 조금씩 지면에서 발을 뗀다. 아주 낮기는 하지만 위로 뛰었다가 다시 땅으로 내려온다. 작은 도약, 마치 아기새들이 엄마새를 따라서 파닥파닥 나는 연습을 하는 것처럼. 

 어설프고 서툴지만 그 모습을 보고, 또 나도 그 안에서 움직이며 배시시 웃음이 났다. 우리들은 조금씩 도약하고 있다.


 살면서 내 몸 하나 건사하기가 참 쉽지 않음을 종종 느낀다.

 발레를 하며 '점프'를 해야만 하는, 점프가 허용되는 장소와 시간 속에서,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고 그저 그 순간 뛰어오르는 일에 집중한다. 내 힘을 다해 내 몸을 공중으로 들어 올리는 순간, 내 발목을 땅에 묶어두고 있던 많은 것들을 끊어내는 기분이다. 겨우 털어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를 끌어내리려는 많은 것들을 버려두고, 점프를 한다. 이상하게도 바닥에 쿵, 하고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뿐, 하고 가볍게 내려앉는다. 내 몸이 어떤 원리로 움직이고 있는지, 내 몸에서 만들어지는 힘을 어디에 사용하고 있는지 조금이나마 알고서 사용하는 순간이기 때문에 그런 걸까? 그래서인지 중력 때문에 금세 다시 내 발을 땅에 내딛게 되지만 그 순간이 아쉽지 않고 유쾌하다.


 센터에서 점프를 배우며 지난 시간에는 잘 못했던 것 같은 동작을 이번에는 저번보다 훨씬 수월하게 해내게 된 것 같았다. 신이 나서 그날 밤, 거실에 나와 점프 동작을 연습했다. 내가 막 신이 나서 발레 동작을 보여준다고 하니 동생이 동영상을 찍어줬다. 영상을 보니 고라니 한 마리가 펄쩍펄쩍 뛰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재미있는 걸 어쩌나! 신이 났다.

 나는 점프를 할 수 있다. 낮은 높이지만 지금의 내가 만들어낼 수 있는 만큼의 동작, 내가 할 수 있는 높이의 점프. 작게나마 나는 도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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