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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누리 Aug 07. 2015

오글의 맛

오글왕의 '오글거림' 예찬가

나는 세기말 그르니까 밀레니엄 카운트다운 시절의 영화를 좋아한다. 걔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것은 심은하가 나오는 <8월의 크리스마스>와 전지현이 나오는 <시월애>이다. 당시 영화 특유의 한없는 아련함에 얹히는 무심하고 촉촉한 대사 처리는 소위 이 시대에서 말하는 '오글거림'을 십분 드러내 준다.


빛바랜 멜로 속 연인은 서로가 없으면 우주가 멸망해버릴 것 같은 절절한 눈빛으로 대화한다. 그러한 맹목적이고도 무한한 순정은 요즘 세상에서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인지, 나에게는 일종의 판타지로 비추어진다.


오늘은 선풍기 앞에 배를 깔고서 <봄날은 간다>를 보았다. 유지태와 이영애가 주연으로 나오는 그 시대의 멜로물이다. 유지태는 내 무릎 위 모니터에서 세상 슬픈 얼굴로 온 낯을 한껏 구기며 울부짖었다.

/..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영화 <봄날은 간다>


나는 오글거리는 것이 좋다. 사실 '오글거린다'는 표현을 싫어하는데, 이 단어가 유행한 이래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많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오글거린다는 표현은 로맨틱하거나 아름다운 것조차 그것으로 함몰시키는 것 같아 매우 속상하다. 이것은 쿨(cool)한 개체들의 언어로, 로맨티크 순정파들의 다채로운 변태 감성들을 '오글거림'으로 획일화시켜버린다.


아무런 감정도 일으키지 못하고 지나가버리는 말이 무수하고, 심지어 청자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말도 많은 요즘 시대에, 사람에게 간질간질한 감정을 전이시키는 달콤한 말들은 보존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주변인들에게 앞장서서 오그라움을 전파하는 오글 찬양종자이다. 농담반 진담반으로 느끼한 표현을 곧잘 하고, 요즘 하는 진지한 생각도  스스럼없이 이야기한다. 나에게 오그라움 없는 삶은 앙꼬 없는 찐빵이다.


그러나 오글거리는 것은 촌스러움이라는 속성도 내포한다. 세련되게 쿨하지 못하고 구구절절 표현을 하거나, 쓸데없이 세상을 진지하게 바라보는 모양새가 촌스러운 꼰대로 비치는 양 싶다. 아마 이러한 촌스러움이 사람들로 하여금 오글인이 되기를 망설이게 만드는 것 같다.


그렇지만 나는 물건이건 사람이건 촌스러운 것이 좋다. 심플한 점선면 및 블랙 앤 화이트로 대표되는 모던의 끝판왕은 무언가 인위적이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인위적인 것은 인간이 만들었음에도 불구, 인간적인 것과 대치된다. 나는 인간의 냄새가 없는 곳에는 살색을 드러내기에 불편하다. 내 속을 비칠 수 없어, 맨발임에도 불구하고 하이힐에 올라선 기분이다.


물론 오브젝트의 목적에 따라 다르겠지만, 사람의 마음을 동해야 하는 경우에는 유연하고 편안한 쪽이 유리하다. 인간은 편안함 속에서 본인을 드러낸다. 그리고 착각한다. 아아 이 오브젝트가 나와 잘 맞는구나. 그렇게 우리는 마음을 내어준다.


그래서 잘 사용한 오글거림은 사람의 마음에 파동을 이는 효과가 있다. 진심에서 우러난 촌스러운 표현은 사람들에게 미소를 끌어내기도 한다. 방긋방긋 웃으면서 진짜 너 없인 못 살겠다고 하는 10년 지기 친구를 떠올리면 으윽 뭐야 하면서도 웃음이 실실 난다.


점점 모바일과 대면하는 개인 시간이 늘어나고, 사람과 살을 부대끼는 일이 적어지면서 사람들은 마음 표현에 인색해지고, 사방에 세련된 로즈골드빛 벽을 세운다. 나는 그 벽에 손바닥만한 창이라도 내보려고 종이에 연필로 편지를 쓰기도 하고, 맥주 한잔을 핑계 삼아 마음 고백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가끔은 체면이라는 것이 없는 세상에서 내가 좋아하는 이들과 함께 밤새 구애의 댄스를 추는 꿈도 꾼다.


나는 언젠가 사람들이 그들의 벽에 시원한 창을 내고서 빛바랜 멜로의 주인공들처럼 촌스러운 마음 표현과 생각 표현을 주고받는 세상이 오기를 바란다.



이렇게 연희동 사랑꾼은 오늘도 방구석에서 몰래 사랑 넘치는 오글 세상을 그린다.


은하언니와 석규오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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