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1-23
Q. 케이프타운 도시에서
대체로 호화롭다. ‘신체의 안전’을 명분으로 미식과 유람을 한다. 낯선 예술을 보고 '대-자연-스러운 것(실은 철저히 인간으로부터 만들어진 경험들)'을 구경한다. 누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끼니때마다 와인을 고른다. 매 공간에서 끊임없이 나의 안위를 살펴주는 서비스를 받는다. 이 모든 경험의 종결에는 비자카드가 있다.
이것이 나의 몫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익숙해지지 않으려 노력한다. 다가갈 수 없는 '안전하지 않은'을 먼 발치에서 관조한다. 이 도시에는 중간이 없다. 적당히가 없다는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중산층이 없다는 뜻이다. 오랜 *차별주의 정책으로 중산층이 무너지고 상하만이 도시를 구성한다. (*지금은 사라졌다지만 명문화되지 않았을 뿐, 도시의 면면에서 그 흔적이 쉬이 찾아진다.) 출생과 함께 랜덤하게 배정된 계층에서는 서로간의 갈등이 피어오른다. 신문기사의 자극적인 헤드라인으로 자주 꼽히는, 이 도시의 살인율과 강간률의 이면에 차별의 역사로 고착화 되어버린 교육과 기회의 불균형이 읽힌다.
양극화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외국인과 업무지구, 쇼핑센터가 모여있는 시티의 중심을 차로 2-3분만 벗어나도 대로변에는 지붕과 벽이 없는 집 내지는 물과 전기가 없는 집이 이어진다. 말 그대로 행렬이다. 그러니까 있는 것 보다 없는 것이 더 많은 집이다. 누군가의 정의로는 집이 아니기도 한 곳이다. 그 집에서 사람이 나온다. 외국인을 태운 우버 기사는 낮고 작은 목소리로 *핸드폰을 숨기라는 말을 건넨다. (*외국인의 핸드폰 및 금품을 강탈하기 위해 종종 차 유리를 깨는 사건이 발생한다고 한다.) 이 사회의 무엇이 일면식도 없는 관계에서 혐오와 두려움을 빚어내게 되었을까.
거리를 걸을 때면 나와 감정적 관계가 없는 대상이 없다. 아무런 의도가 없는 걸음이나 시선에 경계를 세우고 미소를 숨긴다. 사회의 치안이란 무엇일까. 범죄는 어디에서 기인하나. A의 탓도 B의 탓도 아닌 너무 오랫동안 곪아버린 그것들에 대해서 골똘하게 한다. 이런 것이 여행의 이유였지. 당연하지 않은 당연한 것들을 겪어보고서야 생각해본다. 참 얄팍하구나 사람은.
Q. IT가 할 수 있는 것이
이 도시의 오랜 문제를 위해 IT가 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배운 것이 그것 뿐이라, 이럴 때에서야 IT를 도구적으로 꺼내본다. 도시를 둘러본다. 의도했거나 의도하지 않았거나, 우버나 우버잇츠는 꽤 괜찮은 일자리를 만들어내고 있다. 종종 쾌활한 우버 기사를 만나면 조심스레 전업인지 여쭙는다. 꽤 많은 이들이 중고차와 스마트폰을 통해 우버로 꾸준한 수입을 만들고 있다. 이곳에서 만난, 일을 하는 사람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근면하고 성실하다. 그러니까 기회의 수가 이슈라는 생각을 한다. 다만, IT가 유효하려면 어느정도 교육과 인프라가 닿아야만 가능하구나. 그것이 닿지 않는 곳에는 물리적이고 기초적인 문법이 필요하다. 환경과 의료, 사회적인 안전망들.
Q. AI가 할 수있는 것이
AI는 어떨까. 거시적인 시각에서 이런 문제를 풀 수 있지 않을까. 어려운 문제풀이에서 나보다 늘 잘해내는 것이 AI였으니까. 한국의 친구와 텍스트 대화를 나눈다. 친구는 말한다. 자본이 닿지 않을 것. AI는 아직 비싼 기술이고. 그런 문제는 돈이 되질 않으니까. 기술발전은 많은 인류를 편리하게 하겠다는 명분으로 돌돌 싸여있지만, 결국엔 자본이 결정의 매듭들을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여기를 돈이 되게 만들 수는 없나.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가 무엇이 중요한가고. 벽과 지붕이 없는 집의 생존과 존엄의 보장이 새로운 다이아몬드로 연결될 수는 없을까. 아아 지금으로선 풀어지지 않는다. (가장 어려워보이는) 자본가에서 자선사업가가 되는 길이 가장 쉬운 길일까. (내겐 그런 능력이 없다.)
Q. 자연은 보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은 모두에게 공평하다. 청명한 하늘, 부서지는 햇살, 뺨을 스치는 기분좋은 바람. 푸른 녹음과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참 다행이야. 이 도시에서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것이 있어서.
이방인의 시선에서 읽히는 어떤 문제를 풀고 싶은 것도 어쩌면 일방적인 것일지도.
많이 아름다운 날씨를 선물받았구나 이들은.
Q. 가치롭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개인마다 가치롭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상이하다. 그런 것이 '가치관' 이니까. 나의 가치관은 자꾸만 거칠거칠 요철이 만져지는 곳으로 시선이 항한다. 많은 이들에게 품어지지 못하는 것들의 이면과 진실을 읽으려고 노력한다. 본인은 예수도 부자도 그 무엇도 아니면서 오지랖도 넓다고 스스로를 다그친다. 그럼에도, 한편으론. 그런 사람도 있어야겠지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어느 누구도 손해보지 않는다면, 이 세계는 수의 논리로의 관성이 너무 센 곳이니까. 꼭 그 밸런스가 나였어야하냐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서도. (그렇다고해서 내 것보다 네 것을 챙기는 성인군자는 결코 되지 못한다. 내 커피와 내 안위가 우선이더라고.)
이기심일지도 모른다.
작가는 그런 사람이어야하니까. 작가가 되고 싶은 마음이 그런 행동을 빚어내는 것이라 생각한다. 노희경 작가의 수필집에서 그러했듯, '작가는 아픈 기억이 많을 수록 좋다. 작가는 상처받지 않기 때문에. 모두가 글감이다.' 결국 가치로운 작품을 하겠다는 이기심에서 가시밭길을 맨발로 걷고 구석구석을 들추고 마음을 안아보려는 것 아니겠나. 더 가치롭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