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다짐

11월 29일 새벽 3시

by 나누리

인간은 지구의 적분이라, 날때부터 지구의 시계를 탑재하고 있다. 그것이 밤과 낮에, 또 계절마다의 신체 상태를 달리하게 한다. 속눈썹 끝에서부터 발뒤꿈치까지 모든 세포에는 인류의 유전적 시계가 들어있다.


나는 유전적 시계 외에도 나의 역사를 담은 후천적 시계도 갖고 있다. 나의 기억에 기반한 그 시계는 온도와 바람의 따가움, 특유의 공기냄새를 단서로하여 나의 몸이며 마음의 태에 영향을 미친다.


달력이 한장남으면 나의 시계는 귀신같이 바뀐 시간을 감지하여 내마음을 동하게 한다. 나를 설레게하던 일들이 겨울에 빽빽한 탓인지, 아침 햇볕이 차가워지면 눈에띄게 두근대는 주기가 잦아진다.


강남역에서 찬공기를 들숨날숨하며 버스를 기다릴때면 세상이 온통 하얗던 열두살의 내 생일이, 해돋이를 향해 수능잘보게해달라고 컵라면 후룩대던 열여덟의 새해가, 신촌의 쌍무지개 아래에서 소개팅하던 지난해 11월의 마지막날이 차오른다.


겨울에는 글도 많이 읽고, 생각도 많이 하게된다. 이번달에는 부쩍 여섯권의 책을 읽었고, 오늘 강남 교보에서 두권을 더 샀다. 누구에게는 가벼운 양이겠지마는 나는 참 이런 것이 오랜만이라, 얼마만에 책상에 쌓인 글의 탑을 보고있자니 부처님 미소가 떠나질 않는다.



요 며칠새 읽고 있는 책들입니다. 네권 모두 양질의 책으로 매우 재밌습니다.


나는 가을보다는 겨울이 독서의 계절이라 생각한다. 가을에는 지긋지긋한 더위가 가시고 찾아온 선선한 공기탓에 바깥 마실의 유혹을 거절할 수가 없다. 부드럽고 살랑거리는 가을 바람은 말그대로 사람 마음을 살살 녹인다.


반면, 겨울의 바람은 따갑고 차갑다. 겨울의 매정한 날씨는 따뜻한 차와 담요앞에 사람을 앉혀놓는다. 하여, 겨울은 오랫동안 가만히 자리하여 읽고 생각하기에 참 좋은 계절이다.


안도현 시인은 책을 버리는 순간이 비로소 책을 소화한 순간이라고 하였다. 나는 아직 문제풀이집같은 책을 제하고는 책을 버린 적이 없는 것 같다. 되려, 책을 그득히 쌓아두고 저것만큼이 나의 뇌주름에 빠득빠득 끼어있을 것이라는 망상을 하곤 했다.


몸은 찬바람에 빳빳히 굳었지만, 몸이 굳은 덕분에 말랑근육을 정신이나 감정에 더 쓸 수 있게된 것인지, 생각도 감각도 온유하고 풍부해진다. 아마도 나의 시계는 겨울을 그런 계절로 포지셔닝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 내겨울의 성격을 이용해서, 적어도 두어권의 책을 버릴 수 있는(버리기보다는 다읽은 시점에 만나게되는 지인에게 선물할 것이다. 그때 누구를 만날지, 어떤 책을 주게될지 기대가 된다.) 추운시절을 보내겠다고 세시의 다짐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