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누리 May 22. 2022

현대 소설의 한 가운데서

1.

일요일 아침이다. 소프트바게트의 배를 가른다. 수입산 버터를 뭉텅뭉텅 자르고, 돼지고기를 삶아 만든다는 잠봉 햄을 한 장 얇게 떼어 대강 끼워넣는다. 잠봉뵈르다. 생각한다. 언제부터 나의 빵이나 햄의 취향이 이렇게 세분화되었던가. 최근의 주식(主食)이 샌드위치가 되면서. 다양한 샌드위치의 조합을 시도해보다가. 기어코 햄이나 치즈의 종류를 줄줄 외게 되었다. 음식 경험이 쌓이면서 좋아하는 음식에 대한 요구나 묘사도 점점 미분되는 것이다. 원하는 것을 잘 알게되니 좋은거 아닌가- 우쭐하면서도, 요샌, 아는 게 많아질 수록 디테일만 늘어간다 싶다. 열일곱에는 이삭토스트에서 10분 기다려 받아들던 햄치즈가 전부아니었던가.


얼렁뚱땅 샌드위치. 요즘의 주식이다.




2.

요즘들어 현대소설을 (이전보다는..) 자주 읽고 있다. (은희경, 양귀자) 책을 읽다가 잠시 허공을 응시할 때, 내가 속한 현재를 현대소설처럼 바라보게 된다. 특히 근 2-3년간은 여느때보다 굵직한 변화의 시류가 읽힌다. 나도, 내 주변도 그 시류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는 모두 사회와 영향을 주고받는 보통 인간일 뿐이니.


전염병으로 고립된 인간은 외롭다. 바깥 활동이 줄어드니, 인간은 온라인으로 연결감을 채운다. 생각의 형성에는 알게모르게 SNS나 유투브, 커뮤니티의 비중이 커진다.(현실 같아 보이지만, 현실에는 없는) 거대한 시뮬라시옹의 장. 인간은 이미지를 흡수하고 이미지를 욕망한다. 보드리야르가 그랬나. 현대 미디어에서 그려내는 이미지는 실재(實在)와 1도 연관이 없다고. 그 연결짓기를 잘 하는 기업이 성공한다.


이미지를 구입하는 일은 효율적이다. 인간은 타인을 읽을  그리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으므로. 이미지를 구입하면, 나는, 곧바로, 그러한 이미지로 전시된다. 특히. 보편가치로 받아들여진 이미지는 실패가 없다. 불패의 신화. 불확실한  세상. 실패 없이 타인에게 그러한 이미지로 보이게 되니. 그것참 얼마나 효율적인 투자인가. 비교적 쉽다. 벤츠나 샤넬, 롤렉스 같은 . (나도 좋아한다. 샤넬 에스파듀 사고싶다. 귀여워.)


그렇다면, 보편가치란 무엇인가. 결국- 욕망의 베스트셀러이다. 헤겔이 그랬던가. 인간은 타자의 욕구를 욕구한다. 타인들이 욕구하는 그것들이. 결국 나의 욕망이 된다. 나의 욕망 중에 타인들이 원하는 것을 흡수한 것과, 나 스스로로 부터 나온 것을 구별지어보라. 나는 정말 원하고 있는가? 또는 타인으로부터 자기존재의 확인(인정)을 받고 싶은 것은 아닌가. 나는 실존주의자에 가까워 주체적인 욕망을 소원하지만, 후자의 경우도 존중한다. 나도 종종 그러하기도 하고, 사람마다의 역사가 다르므로. 그러나 지향하는 쪽은 전자다.


특히 근 2-3년은 그 시류가, 여느때보다 부동산, 비트코인, 주식- 더불어 명품 전시나 SNS 발달로, 더더욱 물질적인 곳으로 옮겨갔다. 최근 놀랐던 사연은. 그간 본디 늘 넉넉하여 물질적인 것에는 초연하던 A마저도, 지난해 서울 재개발을 노리고 빌라를 매입했다고 했다. 자산 불리기에 성공한 사례들에 쉽게 노출되니, 저도 모르게 추월되는 기분을 느낀 것 같았다. 오랫동안 부에 초연하던 그 아니었던가. 더이상 본인의 유니크가 유니크가 아니게 되는 기운을 느낀 것 같다.


근래 사회적 트렌드가 물질로 옮겨가면서, 사람들의 관심이 그쪽으로 모였고. 그렇게 부의 사다리가 가시화되었다. 사다리 아래의 사람은 사다리를 보고는 위태롭게 발을 뻗었다. 사다리 위에 있던 사람은 아래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을 보며 조바심을 느꼈다. 사다리를 쥐고 있는 것이 더이상 희소해지지 않으면서. 위도 아래도 위태로운 광경..


그러나 아시다시피- 사회적 트렌드는 정반합. 어떤 가치에 대한 주입이 가득차면 사람들은 지치기 마련이다. 최근 부동산, 비트코인, 주식이 줄줄이 하락하면서. 더욱 그 속도가 가속화될지도 모르겠다. 주입되던 인간은 지친다. 쥘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쥘 수 없는 것이었고. 본디 온전한 나의 욕망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이었을 경우, 더욱 생각하기 나름의 단계로 바뀌게 된다. 그러면서 그것의 반대가 올라온다. 가령, 인간성의 회복이랄지 치유나 힐링이랄지. 그동안도 늘 반복되었던 가치들이 새로운 용어로 옷을 입고서. (재미있는 사실은, 최근의 물질적 시류 직전. 코로나 이전에는, '미니멀리스트'나 '제로웨이스트' 같은 가치가 유행이었다. -지금도 보이기는 하지만, 현재는 확실히 화려한 쪽이 대세이다.- 지금과는 또 대조적이야. 이것의 와리가리-가 점점 빨라지는 것 같기도 하고.)



두 권 다 좋다.



3.

구독하는 종이신문이 조선일보인데. 새 정부 특집기사가 '젠더갈등'이다. 흥미롭게 시리즈를 읽고 있다. 기사에서 인용한 설문조사를 보면, 2030에서 젠더갈등이 심각하다고 응답한 비율이 80퍼센트를 치닫는다. 현재 우리나라의 젠더갈등이, 사회 갈등계의 대부인 프랑스가 보기에도 경이로운 수준이라고 한다. 흥미로워.


나는 딱.  젠더갈등 피크인 30대초반 결혼적령기로 명명되는 인간으로서, 그것의 기운을 아주 강하게 읽을 수 있다. 이런 사회적 이슈를 한가운데서 느끼는 것이 몹시 영광(?)스럽다고도 생각한다. (나중에 할머니가 되어 내가 느낀 것을 영웅담처럼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단 공상 속에서..) 


손해보지 않겠다는 그 텐션. 베스트셀러적인(실패하고 싶지 않으므로-) 타인의 욕망의 평균적인 이상형을 두고서.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찾아다니는 영혼들이 많이 있다. 네가 진짜로 원하는 것이냐 왕왕 묻고 싶지만, 나도 그 질문 앞에 자유롭지 못하므로 관둔다. (최근 읽는 소설에서도 주인공은 결혼 앞에서, 결국 모순적인 선택을 한다. 그래. 삶은 모순이고, 살아가며 탐구하는 것이라.)


예민한 이슈이지만 조심스럽게 견해를 밝혀본다. 본인은 페미니즘을 윤리적 패러다임 변화로 보는 관점이다. 그간 남성 중심적 사회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니까 현대 이전은 대부분. 그러면서 남성적 가치관(전쟁을 떠올리면 쉽다.)이라고 불리는 성과주의나, 경쟁, 이성 이런 가치가 지배적이었다. 힘의 논리이다. 그러나 그 안에서 인간은 결코 완전히 행복할 수 없었고. 그래서. 그렇게 찾게된 것이 현대의 페미니즘. 여성적 가치관인(전통적인 모성에서 나타나는.) 포용이나 배려, 따뜻함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아직 이쪽으로의 식견이 부족하지만. 현대의 멘토로 지지되는 인물이 인간성을 품고 있는 기업가 백종원이나 오은영 박사님 쪽으로 기우는 것도 이러한 현상이 드러나는 것이라 생각한다. 첨예한 경쟁 속에서 사람들은 공연히 아프다. 그리고 따뜻함을 만났을 때 환호한다. 그것의 희소성을. 그것의 가치를 잘 아는 것. (단언해본다. 아프지 않은 현대인은 없다. 삶은 희노애락. 본디 희락과 함께 애노를 안고 가야하는 법.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 생각한다.)


결국, 경쟁과 갈등, 이성적이라고 하면서 냉정한 선택들. 이젠 지친다 이거다. 이제 발전할만큼 발전했고, 좀 내려놓고 우리 따뜻하게 살아보자. 그런 패러다임으로의 변화가. 성별에 주어지던 그런 보편적인 무게 좀 서로 내려놓고, 각자를 인간대 인간으로 바라보며- 서로의 고유성을 인정하고 잘 살아보자. 그런게 최근의 여성적 가치관이 필요해진 이유 아니겠나,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각박한 세상. 편 가르기나 혐오가 되어서 서글프지만.)




4.

조금만 내려놓으면 보이는 것들이 많이 있다. 쥐려고 하면 달아나고, 비로소 초연해졌을 때 가질 수 있는 것이 인생이 아니던가. 요가의 말미에 짧은 명상 시간에마저, 끝나고 집 가는 길에 아메리카노 사갈까 빵집 열었을까 잡념에 가득찬 본인이지만. 글쎄 점점 명상 없이도. 초연함에 가치두기를 하고 있다. 어쩌면 뻔뻔해지는 길 같기도 한데, 타인에게 상처주기나 피해주지만 않는 선을 지키려고 하면서. 본인 안에서의 욕망과 본인 안에서의 감정대로가 결국, 삶의 주체성을 회복하는 길이란 생각으로.




5.

우리 모두. 피투(彼投) 되어진 삶 아니던가. 각자의 기투(企投)를 실현하며 살 뿐이다. 그것이 보편적인 것일 땐 그런 대로, 그것이 주체적일 땐 그런 대로. 정답은 없어. 익명의 n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그것은 상관 없어. 나를 믿고 간다. 넘어지면 크게 왕- 울고(중요! 반드시 울어야 됨.) 어쩔 수 없지-다음에 잘하자. 생각하고는. 다음에는 그런 모양의 돌부리를 더 조심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쿨하게 말하지만, 나도 잘 안된다. 모태 찌질 성품이라.. 그러려고 노력중.)


최근 Y와의 대화와 같이.

힘 빼고 부유하다가- 인생을 걸고 싶은 것이 생기면, 자존심따위 버리고 투신한다. 그것이 내가 사는 방식1. 인생 찍먹파 온통 진심파라 인생이 피곤할 따름이지만, 덕분에 찐하게 배우고 찐하게 스스로를 깨닫는다. 그러면서 점점 내 것이 깊어지고 판단에 명확해진다. 그것이 내가 사는 방식2.


삶이 엉킬 때 막막함에 안절부절 하던 시절도 꽤나 지나고. 이젠, 엉킴을 마주했을 때. 나를 지지하는 ABC들과 머릴 맞대어 엉킨 매듭을 풀어내는 맛과, 매듭을 풀었을 때 획득하는 삶의 스킬들에 대한 기대가 같이 스민다.

깊어지는 삶이 주는 쓴 맛이 꽤나 맛있다.





흑만 있는 것도 백만 있는 것도 없어.

흑과 백, 선과 악. 그것은 분리되지 못한.







최근 가장 좋아하는 물건들

글과 관계 없는 이야기지만. 헤드셋의 유행 정말 좋다. (마침 에어팟 케이스를 잃어버리기도 했고 ㅋㅋ)

추천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행복을 견인하는 것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