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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초 May 08. 2018

여행을 시작하며

가보지 못한 곳에 대한 그리움

 언젠가부터 유럽은 내게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단 한 번도 못 밟아본 땅이건만 TV, 영화, 그리고 책에서 본모습들을 마음대로 섞으며 나름대로 유럽의 이미지를 그려나갔고, 종국엔 막연한 그리움을 느끼게 되었다. 스무 살 때 대학에 입학했을 때부터 졸업 전에 유럽 여행은 꼭 한 번 가보리라 마음먹었다. 그러나 동아리 활동, 연애, 계절학기를 핑계로 여행을 가고 싶은 마음에 제동을 걸어왔다. 마침내 졸업 직전에 대학원을 합격하고 나서야 이윽고 '여행을 가면 안 되는 이유'는 모두 사라지고 '여행을 가야만 하는 이유'들만 남았다. 이번엔 진짜 가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초등학교 때 이걸 보곤 죽기전에 베네치아에 가겠다고 결심했다.

 

 첫 번째 문제인 돈은 부모님의 지원으로 해결되었다. 부끄럽지만, 알바할 시간에 독서하고 공부해서 차라리 그 시간을 더 가치 있게 쓰라는 미명 하에 부모님의 아낌없는 지원을 받으며 지내고 있다. 대학원에 진학해 월급을 받아야만 독립할 수 있을 것 같다. 


 두 번째 문제는 '누구와 가느냐'였다. 여행 전 가장 골치 아팠던 문제였다. 여행 기간이 2박 3일도 아니고 한 달이나 되니 정말 잘 맞는 친구와 가는 게 아니면 가서 싸울 것이 분명했다. 일단 후보군을 추리기에 앞서 후보군 자체가 없었다. 다들 이미 갔다 왔거나 겨울에는 가기 싫다는 의견이 많았다. 심지어 누구는 갈 수 있을 거라고 얘기했다가 며칠 후 못 가겠다고 하기도 했다. 빨리 비행기표도 사야 하고 계획도 세워야 하는데 같이 갈 사람을 못 찾고 있으니 살짝 조급해졌다. 혼자 가면 만사가 편하겠지만, 부모님께서 워낙 불안해하셔서 그럴 순 없었다. 솔직히 나도 꽤나 긴장이 돼서 혼자 가기는 싫었다. 12월이나 1월에 여행을 갈 생각이었는데, 9월에야 간신히 같이 갈 친구를 구했다. 굉장히 친한 내 고등학교 친구로, 장난기가 심하지만 괜찮은 친구다.


 9월에 대학원 합격 소식과 함께 유럽 여행이 확정된 후, 성적이 중요하지 않은 막 학기는 유럽여행에 의한, 유럽여행을 위한 학기였다. 매일 네이버 카페 <유랑>과 학교 도서관을 들락날락하며 책을 빌려오고 읽으며 정보를 수집했다. 같이 가기로 한 친구 승민이도 아직 예과생인지라 성적이 중요하지 않아, 나한테 유럽 여행 책을 빌려가서는 수업 시간마다 읽으며 시간을 때운다고 했다. 


 이 승민이란 친구에 대해 설명하자면, 무려 네 번의 시도 끝에 의과대학에 합격한 의지의 남자다. 지금 다니고 있는 대학이 내 학교와 불과 50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일주일에 4일은 우리 학교 기숙사에서 산다. 당연히 그동안 있는 수업은 모조리 다 짼다. 역시 의지의 남자다.


 나 또한 여행을 위해 여러 가지를 준비했다. 더 즐거운 여행을 위해 독일어 회화와 현대 미술 수업을 신청했고, 네이버 카페 유랑, 구글을 통해 여행 정보를 수집했다. 그뿐 아니라 승민이와 함께 카메라 장비를 구입하고, 유튜브로 동영상 편집 기술을 공부하며 여행 동영상을 찍을 준비까지 했다. 갈 도시들을 구글 지도에 표시하며 어서 빨리 떠날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갑론을박 끝에 최종 결정된 여행지.

 비행기도 그럭저럭 싼 가격 (12/18 파리 in - 1/18 로마 out, Alitalia 항공사, 75만 원)에 예매했고, 유랑에서 유레일 패스도 미리 구입했다. 착실히 준비가 끝나가는데 막바지에 문제가 터졌다. 승민이가 듣는 과목 교수님이 학사력에 표시된 종강보다 늦은 날 기말고사를 보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리고 그날은 우리가 파리로 떠나는 12/18일이었다. 비행기표를 싸게 예약한 만큼 취소했을 때 위약금이 워낙 큰지라 최대한 교수님을 설득해야 했다. 어쨌든 시험만 치르면 F를 피해 유급을 면할 수 있다. 스카이프로 구술시험 치기, 혼자 미리 시험 보기 등 다양한 방법을 생각해 교수님께 메일을 보냈지만, 교수님의 답변은 메일을 읽고 나서도 3-4일 후에 짧게 도착했다. "불가능하다." 교수님... 아아...


같이 떠나기 위해 별 방법을 다 생각했다.

 결국 승민이는 비행기를 취소했고, 여행 시작도 전에 31만 원을 허공에 날렸다. 잔뜩 열 받은 승민이는 22일 날 파리에 도착하는 대한항공 직항을 예약했다. 그리고 졸지에 나는 파리에서 혼자 4일 동안 있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가본 적 없는 해외를 혼자 가는 것에는 걱정이 앞섰다. 혼자 여행해본 적은 있지만 그건 국내였다. 언어는 별로 문제없지만 소매치기가 가장 걱정이었다. 짓궂은 친구들은 '너는 사람을 너무 쉽게 믿는다.' '낯선 사람이 사탕 준다고 순진하게 따라가서 돈 뺏기는 거 아니냐'며 나를 놀렸다. (그리고 이 일은 현실이 되었다) 


 어느덧 여행 전날이었다. 준비물을 가방에 넣을 때마다 준비물 목록에 하나씩 줄을 그었다. 분명 설레고, 정말 기다렸던 순간인데도 일말의 귀차니즘이 마음속에 남아있었다. '그냥 집에서 게임이나 할 걸 그랬나'하는 마음이었다. 신기한 감정이었다. 왜 여기까지 와서 갑자기 다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드는지 궁금했다. 그래도 이제 와서 멈출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짐을 꾸렸다. 일찍 일어나기 위해 11시에 누웠는데, 알 수 없는 이유로 잠들지 못하다 1시에 겨우 잠들었다. 

30일동안 함께할 짐들


 6시에 일어나 짐을 한번 더 점검하고 아침을 먹은 후 집을 나섰다. 그때가 아침 8시였다. 오랜만에 다시 오는 인천 공항은 여전히 엄청나게 컸다. 한참 기다려 수속을 마치고, 배웅 온 엄마와 인사를 마치고, 보안 검색대를 통과한 끝에 비행기에 탔다. 내 자리가 앞, 뒤, 옆에 사람이 없는 천혜의 자리라 기뻐하다가, 원래 내 왼쪽 자리가 친구 자리였음을 떠올리곤 잠시 묵념했다.

공항 가는길.

 


“우리 비행기는 잠시 후 샤를 드골 국제공항에 도착합니다.”


로마 경유를 거쳐 스무 시간의 비행 끝에 파리에 도착했다. 몸도 마음도 지쳐있었다. 꼬박 하루를 좁은 비행기 안에서 보내다니. 어느새 시간은 밤 12시였다. 길을 몰라서 몇 차례 헤매다가 나가는 문을 찾아 여행 첫 숙소인 Citizen M 호텔로 향했다. 

Citizen M Hotel - 1박 10만 원, 샤를 드골 공항에서 걸어서 5분


처음 만나는 드골 공항.
저 앞에 보이는 건물이 내 첫 숙소였다.  


 로비에서 만난 친절한 형의 안내로 무사히 방에 들어갔다. 넓지는 않았으나 깨끗하고 시설 좋은 방이었다. 여기저기 무사히 도착했음을 알리고 씻지도 않은 채 침대에 누웠다. 침대 바로 왼편에 붙은 창문으로 바깥이 보였다. 가로등 노란 불빛이 잔뜩 켜진 거리는 고요했다. TV를 켜니 온통 못 알아듣는 언어가 쏟아져 나와, 비로소 유럽에 온 게 실감이 났다. 친구들과 밀린 카톡을 하다 2시쯤 잠에 들었다. 





 시차 때문인지 6시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방에 있는 TV가 온갖 예능, 영화를 무료로 다 볼 수 있어 마음에 들었다. 영화 <어바웃 타임>을 틀어놓은 채 나갈 준비를 했다. 워낙 좋아하는 영화라 준비하다가 영화 보고, 준비하다가 영화 보고를 반복하니 영화가 끝나고서야 나갈 준비를 마쳤다.  


여행 첫 날, 호텔 앞 거리 


 여행 첫날부터 하늘이 너무 흐렸다. 항상 이러진 않을 거라 스스로를 다독이며 파리 시내로 가는 '루아시 버스'를 타기 위해 다시 공항으로 돌아갔다.


 샤를 드골 공항은 파리 도심에서 차로 40-50분 거리에 떨어져 있어 루아시 버스나 RER (지하철)을 타고 도심으로 이동해야 한다. RER에 소매치기가 많다는 정보를 듣고  루아시 버스를 선택했는데, 사실 요새 소매치기가 별로 없어 RER을 타도 별 문제없다는 사람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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