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비스.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
도쿄의 마지막 밤은 하염없이 걸었던 기억밖에 나지 않는다. 첫 해외여행인데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쉽기도 하고, 무언가를 더 보거나 사기에는 시간도 돈도 여유가 없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숙소를 최대한 천천히 돌아가며 이곳을 더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궁금했다. "일본에도 불금이 있을까?"
숙소가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은 거리에서 자취를 감췄다. "역시 금요일 밤에는 다들 일찍 집에 돌아가나 보다." 어쩌면 일본스럽다고 생각을 하던 찰나, 골목의 조그마한 선술집 밖으로 넘치는 조명 빛을 보았다. 그 안에는 하얀 와이셔츠 차림의 일본의 직장인들이 가득 모여 나마비루(생맥주)를 외치고 있었다.
발 디딜 틈 없이 가득한 그 선술집의 열기가 전해졌는지. 참지 못하고 편의점으로 향했다. 그렇게 남은 엔화를 탈탈 털어 에비스(Yebis)를 샀다. 일본에서만 맛볼 수 있는 특별한 맥주니까, 언제 다시 만나보겠어.
그런 에비스가 내한을 했다. 국내의 몇몇 고급 일식집에서 에비스 생맥주를 판매한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한국의 마트와 편의점에서 판매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에비스는 해외에 수출하지 않는 것이 원칙인 줄 알았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한국이 첫 수출국가라고 한다.
곧장 편의점에 달려갔다. 첫 번째 편의점에는 이미 동이 난 상태. 초조한 마음에 다음 편의점, 그다음 편의점을 방문한 뒤에야 황금빛으로 빛나는 녀석을 만날 수 있었다. 만족스러운 마음에 뒷사람 생각을 안 하고 에비스를 쓸어왔다. 이토록 한국에 에비스를 기다리는 빠가 많다니. 동질감이 느껴진다.
에비스를 아는 사람은 보통 일본 여행을 가는 지인에게 꼭 에비스를 부탁한다. 친구(라고 말하고 에비스)가 언제 올까 기다리는 것이 또 하나의 매력이다. 하지만 역시 기다림의 미학이니 뭐니 해도. 당장 코앞에서 살 수 있고, 바로 마실 수 있는 편이 더욱 좋다.
캔 뚜껑을 땄다. 곧 황금빛 에비스가 유리잔 안으로 떨어지고 구름 같은 거품이 쌓인다. 외관만 보면 아사히나 기린과 다를게 뭐냐고 물을 수도 있지만, 에비스는 그들보다 정통에 어울리는 타협 없는 제조방식으로 생산되는 진짜 중의 진짜다. 그 깊이는 마셔보면 알 수 있다.
에비스는 가볍게 마실 수 있는 라거 맥주지만 카스, 하이트보다도 씁쓸하고 단 맥아의 맛이 진하게 느껴졌다. 탄산과 거품 덕분에 목 넘김도 부드럽고, 마신 후에 입안에 남는 향까지도 고급지다. 한 입, 한 입 소중히 마시려고 했는데 너무 잘 넘어간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다.
에비스만 마시는 것도 만족스럽지만, 다른 안주와 함께 마시는 것이 더욱 좋을 것 같았다.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은 초밥이다. 개인적으로 초밥을 먹을 때 맥주를 즐겨하지 않는 편이었다. 하지만 에비스와 함께 먹는 초밥이라면, 도쿄에 다시 날아온 기분이 들지 않을까 싶었다. 역시 근사한 맥주는 그에 맞는 안주를 부르는구나.
그렇다. 안주까지 즐기기에는 에비스의 가격은 제법 비쌌다. 유수의 수입맥주들이 마트와 편의점에서 4캔에 만원으로 책정되고 있는 요즘. 한국 물정을 아직 모르는 에비스의 가격은 350ml에 3900원, 500ml에 4700원이다. 당연하게 4캔에 만원일 줄 알고 쓸어온 나의 지름신에... 건배를 하게 된다.
물론 에비스는 일본 내에서도 비싼 맥주다. 그런 고급화 이미지를 지켜가겠다고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에비스와 같은 라거계의 원조 할머니 맛집인 '필스너 우르켈'이 4캔 만원의 대열에 있다는 사실이 눈에 걸린다. 결국 에비스도 할인이 되지 않을까 싶으면서도, 우리가 그동안 다양한 맥주를 즐기기만 했지 그 가격을 평가절하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인 생각을 밝히자면 에비스는 가격보다 훨씬 높은 행복감을 선사해준다. 도쿄의 밤에서 마셨던 그 특별함은 아니겠지만, 다시 만날 수 없을 것 같았던 친구가 동네로 이사온 기분이다. 아까는 가격도 모르고 꿀꺽 꿀꺽 마셨지만, 이제는 한 입, 한 입 음미하면서 마셔주마. 한국에 온 걸 환영한다. 에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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