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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시즘 Dec 13. 2023

대형병원 닥터페퍼 실종사건

#이색 음료 공간 방문기 _ 병원 마트 음료코너

병원. 그곳은 공기도 사람도 다른 멀티버스 같은 세상이다. 이곳에서 보호자로 며칠간 보낼 계획을 하며 나는 다짐했다. 언제나 내 곁을 지켜준 음료들과 잠시 떨어져 지내는 것이다. 마시즘의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거나, 앞으로 '물시즘' 혹은 '녹즙시즘'이 되겠다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강제로 며칠 음료를 끊어보았다가 다시 마시면... 얼마나 맛있을까!? 눈이 뜨이고, 피가 돈다는데(원래 사람은 눈이 뜨고, 피가 돈다).


그렇다.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의 길. 하지만 그때까지는 몰랐다. 이곳 병원에는 병원만의 음료라인업이 있다는 것을.



병원에는 특별한 음료가 있다

A병원은 지상으로 다양한 치료시설과 병동이 있다.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만 본 병원의 모습이다. 하지만 병원 구석에 있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에 내려가면 색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여기가 병원이야 백화점이야? 


마치 해리포터에 나오는 '다이애곤 앨리'처럼 색다른 시장이다. 한식집, 중식집, 일식집, 푸드코드... 옷 매장에 휴대폰 판매점, 미용실, 은행... 이러다가 우체국도 있겠는걸(있다).


그중에서 단연 눈이 간 곳은 '마트'였다. 편의점보다는 크고 동네 마트보다는 작은 규모였지만, 보유하고 있는 음료만큼은 이마트, 홈플러스 못지않았다. 일단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 숙취해소음료는 많은데 술은 없다.

- 국내음료도 있지만, 해외음료도 굉장히 많다. 산펠레그리노, 팁코, 분다버그... 등.

- 처음 보는 건강음료(베지밀로 유명한 '정식품'이 만든)가 가득하다. 

- 자판기는 있는데 콜라, 사이다가 없다. 대신 포카리스웨트와 컨피던스가 있다. 


마지막으로 '닥터페퍼'가 있었다. '제로'가 아닌 '오리지널'이었다. 이 정도 작은 매장에 소신 있게 닥터페퍼를 판다니. 반가운 마음에 한 캔을 사서 마셨다. 음료를 잠깐 끊기로 했지만, 닥터페퍼 하루 한 캔 정도는 괜찮겠지.


그런데 다음 날, 마트에 닥터페퍼가 사라졌다. 



대형병원 닥터 실종 사건

그렇다. 한 줄로 늘어서있던 닥터페퍼가 사라졌다. 닥터페퍼가 있던 자리에는 옆에 놓여있던 하얀색 몬스터 에너지 울트라가 대신하고 있었다. 


의사와 간호사를 찾는 환자의 심정으로 일정한 시간마다 마트에 내려가도 닥터페퍼는 채워지지 않았다. 내가 마트 주인이어도 대중성 있고 잘 팔리는 음료를 더 채워 넣고 싶을 것이다. 그 마음을 알았어야 하는데... 그때 봤을 때 사재기(?)를 해뒀어야 하는데.


닥터페퍼가 사라지고 다시 음료를 끊어보자고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다음 날 '닥터페퍼'가 돌아왔다. 다시 그 자리에 한 줄을 채워놓았다. 발견하자마자 2캔을 샀다. 어제 못 마셨거든. 


그런데 오후가 되자 다시 마트에는 닥터페퍼들이 사라지고 없었다.



누가 병원의 닥터페퍼를 마셨을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병원에는 나와 같은 '닥페러'가 한, 두 명은 더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보이는 족족 사버리는 게 아니고서야 이렇게 빨리 소비될 음료가 아니다. 닥터페퍼는 100명이 1캔씩 마시는 음료가 아니라, 1명이 100캔씩 마시는 음료니까. 


다음 날 오전 다시 닥터페퍼가 찼다는 걸 체크하였다. 나는 소비자로 위장하여 음료코너를 관찰했다. 일단 의사 가운을 입은 사람이 1캔(그는 진짜 닥터기에 닥터페퍼를 마실 자격이 있다). 그리고 콜라와 닥터페퍼 중 고민하던 일반인이 1캔을 샀다. 


그런데 잠깐 '보호자 역할'에 한눈을 판 사이 닥터페퍼는 모두 사라졌다. 젠장 본분을 잊다니! 나는 궁금함이 수줍음을 뛰어넘은 나머지 마트 계산대 직원분에게 물어보고 말았다.


"닥터... 아니 이거(제품명을 모르실까 봐 휴대폰 속 사진을 보여줬다) 누가 사가나요?"

"아 많이들 드세요. 인기 많아요."


닥터페퍼는 나만 아는 음료가 아니었다. 건강러들만 있을 것 같은 이곳에서 '닥터'는 안 찾고 '닥터페퍼'만 찾다니. 바깥에서는 호불호 음료로 불리는 이 음료가 이곳에서는 투쁠한우라니! 



한 캔의 닥터페퍼 같은 희망이 찾아오길

나만 아는 가수, 나만 아는 카페, 나만 아는 닥터페퍼... 같은 것은 없다. 내가 좋아한다면 나와 비슷한 성향을 가진 누군가도 이것을 좋아할 확률이 크다. 이런 깨달음을 얻을 때쯤 병원은 우리를 퇴원시켜 주었다. 


하지만 여전히 닥터페퍼를 보면 나는 다시 병원 지하에 있던 마트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든다. 많은 병들과 싸우며 완치의 길을 걷는 환자와 의료진의 분주함처럼,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한 캔의 닥터페퍼를 구매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들락거리는 희망의 공간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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