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성비의 끝판왕 필라이트, 더 킹덤 오브 벨지움
“좋은 맥주란 무엇일까.” 마트에 한가득 쌓인 맥주의 산 앞에서 나는 철학적 고뇌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짤랑. 주머니 안에 든 얄팍한 동전 소리가 분위기를 깼다. 나는 이 요망한 동전들을 떨어뜨려 놓기 위해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알아버렸다. 아! 카드를 놓고 왔다.
그때 알았다. 세상에 좋은 맥주 후보는 많지만, 내가 만날 수 있는 맥주는 무한하지 않다는 것을. 그렇다면 내가 가진 동전 몇 닢으로도 살 수 있는 맥주가 있을까. 다행히 맛도 가격도 착한 혜자스러운 맥주를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참 좋은 맥주다.
필라이트를 마주친 것은 정말 행운이다. 초록색으로 만들어진 캔 가운데에는 덤보처럼 생긴 코끼리가 하늘을 날며 나에게 인사를 했다. 나는 필라이트가 인도에서 만들어진 맥주라고 확신을 했었는데. 포장을 돌려보니 하이트 진로 마크가 눈에 들어왔다. 아, 한국에서 오셨어요? 반갑고 당황스러움이 교차하는 순간이다.
하지만 필라이트의 가격을 보는 순간 뻘쭘함은 놀라움으로 바뀐다. 355ml 캔에 850원, 500ml 큰 캔은 1,200원이었다. 만원에 12캔을 주는 행사도 하고 있었으니 자취생들에게는 하늘에서 맥주가 떨어지는 기분을 느끼게 할만하다.
기대 반, 걱정 반으로 필라이트를 개봉했다. 열대과일 향기가 제법 풍부하게 도는 것이 100% 아로마 호프라는 것을 인증해주었다. 발포주라는 특징답게 얌전하게 맥주에 숨어있던 거품들이 마개를 따서 잔에 따르자마자 빵처럼 부풀어 오른다. 첫인상은 제법 괜찮다.
드디어 필라이트를 마셨다. 그제야 필라이트가 한국 맥주였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알게 되었다. 청량한 한국 라거 맥주의 맛을 났기 때문이다. 물처럼 가볍고, 탄산은 톡 쏜다. 한 여름에 마시면 정말 시원할 것 같은 느낌. 냉동고에 잠깐 넣었다가 마시면 더욱 좋을 것 같다.
맛으로 돋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 아쉬운 점이다. 하지만 옅은 맛과 가득한 탄산은 음식과 함께 할 때 빛이 난다. 치킨과 피자를 먹을 때 콜라를 대신해도 좋은 조합을 이룰 것 같다. 본격 반주용 맥주의 탄생인 것인가.
벨기에는 맥주의 나라이다. 맥주 순수령으로 맥주의 전통을 지킨 독일과 다르게 맥주 제조에 규제가 없었다. 때문에 벨기에 맥주는 화려하고, 자유롭다. 그런데 그 다양한 벨기에 맥주 중에 ‘더 킹덤 오브 벨지움 맥주’는 한국의 맥주와 닮아있다. 심지어 가격까지 저렴하다. 브루어리 마틴즈는 대체 어떻게 맥주를 만드는걸까.
- 더 킹덤 오브 벨지움 필스너
먼저 내가 좋아하는 필스너(체코 스타일의 라거 맥주)다. 같은 라거지만 향과 맛에서 국내의 라거 맥주보다는 무게감이 다르다. 탄산도 적은 것이 입 안에서 중후하게 머무르다가 씁쓸한 홉의 맛을 보여주고 사라진다. 맛의 무게감과 색깔 덕분에 다른 간식 없이 더 킹덤 오브 벨지움 필스너만 마셔도 좋을 것 같다.
- 더 킹덤 오브 벨지움 엑스포트
엑스포트는 수출용으로 만들어진 맥주를 말한다. 그런데 황금색의 맑은 더 킹덤 오브 벨지움 엑스포트를 보면 한국 맥주가 떠오른다. 고소한 향과 함께 한 모금 마시면 시큼하고 쌉싸름한 풍미가 느껴진다. 라이트 라거와 필스너 사이의 어딘가를 지향하는 맛. 필스너를 좋아하지만 더 킹덤 오브 벨지움에서는 이쪽에 한 표를 주고 싶다.
증류주는 비싸고, 와인은 격식을 차려야 한다. 그렇게 따지면 맥주는 참 친근한 술이다.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자기 전에 마신다. 맥주는 아무런 요구를 하지 않는다. 누구는 잠옷바람으로, 누구는 쌩얼로 마신다. 그럴 때 더 맛있다.
세상에 맛있는 맥주는 많다. 하지만 내 옆에 편하게 마실 수 있는 맥주가 더 좋다고 느껴지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