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료신상털이_루트비어
어두운 밤, 도쿄의 골목길을 헤맨다. 단지 음료수를 사러 나왔을 뿐인데 돌아가는 길을 잃었다. 나의 길치 능력이 해외에서 더욱 빛나는구나. 엄마한테 자랑해야지. 물론 무사히 숙소에 돌아갈 수 있다면 말이다.
발걸음이 바빠질수록, 인파는 사라진다. 가로등마저 꺼진 골목길 귀퉁이를 돌자 자판기 불빛이 눈에 부딪힌다. 기괴하게 생긴 자판기의 멜로디는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한국에서 온 음료 신상털이. 마시즘. 언젠가 널 만날 줄 알았지."
일본은 자판기마다 배치된 음료수가 다양했다. 하지만 이 으스스한 자판기에 있는 음료수에 비하면 평범 그 자체다. 자판기에 '루트비어(Root Beer)'를 만날 것이라고는 상상을 할 수 없었다. 한국에서는 찾기 힘든 월드와이드 호불호 음료수가 아닌가!
그렇다. 루트비어의 악명은 인터넷에 널리 알려졌다. 닥터페퍼가 커피라면, 루트비어는 티오피랄까? 무섭고도 궁금한 마음에 남은 엔화를 자판기에 헌납했다. 음료계의 빌런, 음료계의 타노스는 어둠을 헤치고 숙소를 향해 걷는다. 아무것도 모르고 날 기다리는 선량한 동료를 향해.
무사하게 귀환했다. 비닐봉지에서 루트비어를 꺼내자 동료들은 묻는다. "맥주야?" 물론 아니다. 루트비어는 맥주가 아닌 탄산음료다. 아니 굳이 말하자면 '사르사'라는 식물의 뿌리를 짜내어 만든 탄산음료다. 아니 비유를 하자면 칡즙에 탄산을 넣고, 설탕을 뿌렸다...라고 글을 써도 수습이 안 되는 것을 우린 '루트비어'라 부른다.
하지만 우리의 기미상궁... 아니 동료들에게 이를 말할 필요는 없다. 나는 루트비어는 실제 미국에서 굉장히 인기가 많은 음료수라고, 옛날 미국 영화를 보면 경찰들이 술집에서 항상 마시는 맥주가 이거라고 홍보를 했다(물론 경찰은 술을 마시면 안 되니까 알콜 없는 루트비어를 마셨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거짓말은 오래가지 못했다. 뚜껑을 열자마자 동료들은 외쳤다. "으악 이게 무슨 냄새야"
뚜껑을 열자 익숙하지만 반갑지 않은 향이 난다. 어릴 때 아빠가 쓰던 구급상자를 열었을 때 맡았던 향기. 바로 파스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이미 동료들은 입을 대기도 전에 전의를 상실했다. 파스 향 나는 음료수라니.
하지만 아직 이 구역의 도전자가 남았다. 바로 나다. 용기 있게 루트비어를 들이켰다. 물파스를 코 밑에 발라놓는 느낌이 들지만, 맛 자체는 달달하고 부드럽다. 연유와 바닐라의 달달함이 느껴졌는데, 이번에는 멘소래담의 향이 난다. 마시고 나니 입이 깔끔하게 씻겨서 다시 한 모금 마셨다. 이번에는 후라보노 20개를 뭉친 맛이 난다.
물론 오해하지 말자. 세상에는 '루트비어'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 해리포터에서 모자가 "그리핀도르"를 외치듯이 루트비어를 마시자마자 운명적으로 엮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바다를 건너서도 루트비어를 가져오고, 루트비어 위에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띄워 마신다. 후. 다양성을 인정하자.
자기 최면을 걸며 루트비어를 모두 마셨다. '나는 미국인이다. 나는 루트비어를 매일 밤에 마시는 미국인이다.' 처음에는 언제 다 마시나 싶었지만, 다 마시고 나니까 약간 그리워지기도 했다. 조금 더 마시면 더 맛있게 마실 수 있을 텐데.
아침이 돌아왔다. 미로처럼 어지럽고 복잡했던 골목길은 반듯하고 가지런하게 놓여있었다. 하지만 그 어느 골목에서도 자판기를 찾을 수 없었다. 불행인 듯 다행인 듯 루트비어와 만남은 그걸로 끝이었다.
맛보다 무용담으로 기억 남는 음료수가 있다. 이런 음료들은 우리가 마시는 음료의 세계를 넓혀준다. 이제 한국에 돌아가서도 "나는 루트비어를 마셔봤지"라고 다른 음료를 귀여워할 여유를 얻었다랄까? 물론 한국에도 서브웨이, 코스트코에서 루트비어를 판매한다는 걸 알지만. 모른 척할 거다. 원래 무용담이란 그런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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