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네스 맥주는 왜 기록에 집착하는가?
고백하겠다. 나의 수학 실력은 구구단과 방정식. 그 이상을 넘어가지 못한다. 나에게 손가락 10개를 넘어가는 수학의 세계는 만화책보다 비현실적이었다. 내가 문과를 선택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숫자를 엑티브 엑스 보듯 기피하는 내가 어려워하는 맥주가 있다. 바로 기네스다. 무슨 맥주 한 잔을 마시기 위해 파인트 잔을 45도 기울이고, 맥주를 파인트 위에서 20~25mm 아래까지 따르고, 119.5초를 기다린 후에 다시 90도로 잔을 세워 거품을 잔보다 2mm 높게 차게... 이게 무슨 수학의 정석도 아니고 말이야.
문득 궁금해졌다. 최고의 흑맥주 기네스가 유독 숫자에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오늘은 기네스와 숫자의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살펴본다.
1759년, 청년 '아서 기네스(Arthur Guinness)'는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맥주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난다 긴다 하는 에일맥주가 만들어지고 사라지는 곳. 하지만 시작이 좋았다. 버려진 양조장을 찾아 값싸게 계약했기 때문이다. 9,000에 45? 오케이 콜! 문제는 9,000파운드에 45년을 계약한 것이 아니라, 매년 45파운드(9만원 가량)에 9,000년을 임대해 버렸다.
덕분에 기네스는 값싼 임대료로 양조장 '세인트 제임스 게이트 양조장(st. James's Gate Brewery)'을 세워 맥주를 만들어 냈다. 이 공장은 기네스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기네스 스토어 하우스'가 되었다. 260년이라는 기네스의 역사를 자랑한다. 물론 아직 임대기간이 8,740년이나 남았다는 것은 안자랑...
양조장을 설립할 때부터 '숫자'로 흥해서일까? 기네스는 인재를 받아들일 때 숫자에 밝은 사람을 구했다. 업계 최초로 과학자와 수학자를 고용한 것이다. 역시 네이티브 문과인 나의 본능이 기네스를 어려워하는 이유가 있었다.
기네스는 '맥주는 손맛'이라는 당대의 통념을 무너뜨린다. 수학 폭격을 통해 맥주가 가장 맛있는 효모의 양과 거품을 만드는 방법을 찾는다. 기네스 캔을 마실 때 딸랑딸랑 거리는 질소 거품기(위젯) 역시 기네스 과학자들이 최상의 거품층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 결과다.
기네스가 고용한 수학자 중에서는 근대 통계학의 기초를 다진 이도 있다. 바로 '윌리엄 고셋(William Sealy Gosset)'이다. 티 분포(Student's t-Distribution)가 이 사람의 손에서 만들어졌다. 원래는 최고의 맛을 내는 효모 투입량을 알아내기 위한 수학적 기법이었다. 윌리엄 고셋은 학계에 이 기법을 발표하려했고, 기네스는 회사의 기밀을 경쟁사가 알지 못했으면 했다.
결국 윌리엄 고셋은 'Student(학생)'라는 필명으로 이론을 발표한다. 학계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재야의 고수 등장에 술렁였다. 윌리엄 고셋이 Student라는 사실은 그가 61세로 사망한 후에 알려졌다. 회사인 기네스조차 그가 논문과 학계활동을 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
기네스의 상무 '휴 비버(Hugh Beaver)'는 동료들과 사냥을 나갔다가 허탕만 친다. '검은가슴물떼새'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술자리에서 그는 검은가슴물떼새야 말로 세계에서 가장 빠른 새"라는 주장을 하고, 일행들은 다른 의견을 말한다. "그래서 도대체 세계에서 가장 빠른 새가 뭔데?"
휴 비버는 영국 최고의 기록광 쌍둥이를 만나러 간다. 여러 진귀한 기록을 수집하는 노리스 맥허터(Norris McWhirter), 로스 맥허터(Ross McWhirter) 형제를 만난 것이다. 휴 비버는 인간과 자연의 1등을 담은 책을 내달라고 의뢰한다. 그리고 1955년 맥허터 형제는 자신들이 수집한 기록을 모아 책을 발간한다.
이름하야 '기네스북 오브 레코즈(The Guinness Book of Record)'의 탄생이다.
기네스북은 술자리 언쟁의 해결도구나 재미있는 마케팅 정도가 될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초판 5만부가 한 달 만에 소진되자 양상이 달라졌다. 1984년에는 5,000만부를 찍고 2004년에는 1억부를 돌파해 '(성경을 제외하고)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으로 등극하기도 했다. 재미삼아 시작한 일이 본진보다 유명해졌다.
기네스는 맛부터 이야기까지 다르게 느껴진다. 다른 맥주들이 사연과 장인정신을 이야기할 때, 기네스는 숫자와 과학으로 설명을 한다. 재미있고 조리있게 말 잘 하는 이과형의 느낌이랄까? 덕분에 독특하면서, 제조과정부터 맛까지 품질을 믿게 만든다. 원래 나 같은 문과는 숫자로 대화하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기네스가 말하면 그게 옳은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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