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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시즘 Jun 07. 2017

나는 야한 맥주가 좋다

수입맥주를 고를 때는 한 가지만 기억하세요. 야한가?

대형마트의 수입맥주 코너는 인간의 선택 장애를 시험하기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 분명하다. 오늘은 친구 커플과 캠핑을 가기로 한 날이다. 장을 보기 위해 마트에 들렀는데 우리는 이 개미지옥 같은 곳에 빠져서 1시간 남짓을 보내고 있었다. 그만큼 밖에서 마시는 음료는 중요하니까.


가장 맛있는 수입맥주를 찾아서

의견 일치를 보이지 못한 우리는 결국 가족오락관 스타일로 남성팀, 여성팀으로 나누었다. 남성팀은 맥주 중에 맥주라는 벨기에 수도원 맥주를 고르기로 했다. '시메이(CHIMAY)'는 그 벨기에 수도원 맥주 중에서도 진짜 수도사들이 만든다는 베스트 오브 베스트 맥주 아니겠는가.


남성팀은 경건하게 시메이를 카트에 담았다(비싸서 깨 먹으면 지옥에 갈 거다). 그때 여성팀이 툭 하고 두 병의 술을 카트에 담았다. 그냥 예뻐서 골랐다는 이 맥주병에는 침대에 엎드린 나체의 여성이 그려져 있었다. 이런 불경한! 부디 눈을 감으십시오 수도사님. 저만... 보겠...


린데만스 람빅 : 자연 그대로의 본능에 솔직한 맥주

우리끼리는 이것을 야한술이라고 불렀다. 오해는 마시라.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를 쓴 마광수 작가는 '야하다'를 천박하게 보지 않는다. 그는 마음이 야하다는 것은 본능에 솔직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나의 눈은 본능에 솔직한 것일 뿐 천박한 것이 아니다.


마광수 작가의 힘을 빌어 음란마귀를 쫓아냈더니 브루어리 이름이 보였다. 린데만스(Lindemans)는 벨기에 브뤼셀 지역의 맥주기업으로 7대째 람빅(Lambic) 맥주를 만들고 있다. 


람빅맥주는 양조장의 손을 거치지 않고 효모가 자연 발효된 맥주다. 정제가 되지 않고 효모 마음대로 방치해둔 람빅맥주는 뭐랄까 시큼하고 관능적이고 복잡하다. 린데만스는 더욱 대중적인 맛과 가격으로 람빅 스타일을 만들어서 어렵지 않다.


린데만스 프랑부아즈 : 진짜 과일이 들어간 맥주가 무엇인지 알려주마

린데만스하면 대표적인 맥주가 크릭(Kriek)과 프랑부아즈(Framboise)다. 크릭은 '체리'를 프랑부아즈는 '산딸기' 뜻한다. 앞서 말했듯이 람빅맥주는 사연 많은 맛을 낸다. 린데만스는 이런 람빅에 과일을 넣은 프룻람빅(Fruit Lambic)으로 대중의 입맛을 사로잡는다.


프랑부아즈를 잔에 따라 마셨다. 짙은 붉은 색깔만큼이나 상큼하고 달콤한 베리의 맛과 향이 가득하다. 스파클링 와인을 마시듯이 자글자글한 탄산을 따라 달콤한 베리의 맛이 넘어간다. 맥주의 맛은 연하지만, 과일의 맛은 몹시 생생해서 그동안 과일맛 첨가해왔던 맥주들은 반성해야 할 지경이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홉의 느낌이 적다는 것이다. 과일주스의 맛은 훌륭하지만 홉의 쓴 맛은 찾기가 힘들었다. 이러한 가벼움 덕분에 유럽에서는 프랑부아즈와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섞어 디저트로 만들어 즐긴다고 한다.


린데만스 빼슈레제 : 저 오늘 이거 마시고 죄인이 되겠습니다

대놓고 야한 술. 린데만스 빼슈레제(Pecheresse)다. 빼쉬는 '복숭아'를 뜻하는데, 빼슈레제는 '죄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서 함께 사용되었다. 애주가들에게는 린데만스가 람빅에 복숭아 과즙을 30%나 넣은 죄책감 때문에 빼슈레제라고 이름을 지은 것이 아닌가라는 설이 돈다. 


빼슈레제는 따를 때부터 복숭아 향이 그득하다. 맛 또한 복숭아의 달콤함 그 자체인데 이슬톡톡이나 호로요이와는 다른 결을 보여준다. 이슬톡톡과 호로요이가 20대 초반의 발랄한 복숭아 맛이라면, 빼슈레제는 좀 더 깊이 있고 고혹적인 맛으로 유혹을 한다.


빼슈레제도 마찬가지로 알콜이 2.5%로 너무 약하다는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빼슈레제의 유혹으로 인해 술자리의 도수는 높아질 테니 걱정 마시라. 그래도 도수가 높길 원한다면 보드카와 섞어 칵테일로 만들어도 좋을 맥주다. 


좋아하는 여성을 위한 남자들의 맥주

세상에 있는 많은 맥주들의 우위를 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이번 술자리에서 승부는 빠르게 결정이 났다. 린데만스의 야한 술은 테이블을 지배했다. 노골적이다 싶은 화려한 맛과 저도수의 편안함은 식전부터 식후까지 언제 마셔도 어울렸고, 우리의 수도원 맥주는 속세의 구석에서 수도를 하고 있었다.


조금 더 깊이 있는 맛과 유명세를 따졌던 남성팀은 패배를 깔끔하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단 하나 아쉬웠던 것은 '저 맥주를 내가 골라서 여자친구를 줬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라는 후회뿐이었다. 패배자들은 집에서 혼자 즐길 시메이를 챙기며 다짐했다. 앞으로 데이트 맥주를 살 때는 야한 술을 고르겠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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