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가고... 아니 마시고 싶습니다
달력이 마지막 잎새다. 창밖을 바라보며 올 한 해를 돌아보는 일이 많아졌다. 정말 많은 사랑을 받았지. 다양한 음료를 소개했고, 그것보다 더 많은 음료를 마셨다. 마시즘. 이제는 명실상부한 음료 미디어 스타트업 1위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아무도 하지 않아서 계속 1등.
행복회로는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다. 실리콘밸리의 한가운데에서 자판기 커피를 홀짝이는 나의 모습이라니. 역시 스타트업의 성지는 실리콘밸리지. 현실은 판교테크노밸리 그림자도 구경 못한 마시즘. 오늘은 실리콘밸리에서 마시는 음료에 대한 이야기다. 비록 몸은 갈 수 없지만 음료라도...
요즘에는 한국에도 맥주 탭이 있는 회사가 있다. 주로 직원들의 의욕을 높이기 위해 맥주파티를 연다(몰래 빠져나와서 혼자만 마시는 사람도 있다... 나). 하지만 실리콘밸리에서는 1940년대부터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주장이 나왔다. 2000년대에 오래된 건물을 부수다가 꿍쳐놓은 오래된 '럭키 라거' 한 박스를 발견했거든.
1939년에 생긴 실리콘밸리의 맏형 'HP'도 오래전부터 금요일 오후에 맥주파티를 열었다. 업무 스트레스를 줄이고, 직원들 간에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려는 것. 맥주파티는 기존의 회사들에 비해 실리콘밸리의 회사들이 캐주얼한 느낌이 되도록 도와주었다. 한 때는 맥주를 직접 빚는 홈브루잉이 인기였다고 한다. 물론 술을 만들건 마시건 쌓여있는 일이 저절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앞에서 술 이야기를 했으니, 이어받아 숙취다. 음주 후의 숙취는 미국도 비슷한가 보다. 실리콘밸리에 떠오르는 숙취해소 음료 '모닝 리커버리'를 보면 말이다. 그런데 이 모습... 익숙하다 보니 한국사람이 만든 것이다. 주인공은 바로 테슬라에서 일했던 이시선씨.
그는 한국에 왔다가 숙취해소 음료의 참맛을 알아버렸다. 미국에 돌아와서도 주변에 열심히 한국의 숙취음료 맛을 보여주다가, 직접 만들기까지 해 버렸다. 그렇게 만든 모닝 리커버리는 클라우드 펀딩에서 목표금액의 10배가 넘는 25만 달러를 모은다. 그리고 6개월 만에 300만 달러의 매출을 기록했다고 한다. 포브스에서도 800만 달러 투자를 받았다는 기사를 내기도 했다.
이제는 캐나다, 유럽을 넘어 한국의 진출까지도 노린다는 모닝 리커버리. 하지만 명심해라 모닝 리커버리. 대한민국에는 컨디션이... 여명이... 그리고 Idh(갈아만든 배)가 있다는 사실을.
얼리 어답터의 삶이란 그런 것이다. 모두가 스타벅스를 다닐 때 국내에 없던 블루보틀을 꿈꾸고, 블루보틀이 한국에 론칭된다는 소문이 돌자 '필즈 커피(Philz Coffee)'를 꿈꾸는 것이다.
필즈 커피는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가 몹시, 굉장히 좋아하는 커피다. 임대료 안 받을 테니 페이스북 본사에 오픈해달라고도 했다고 하고(결국 오픈했다), 자기 결혼식에도 필즈 커피를 따로 서비스했고, 결혼 다음 날에도 매장을 찾아간 것으로 유명하다.
필즈 커피의 시그니쳐 메뉴는 '민트 모히또 아이스커피'다. 풀때기... 아니 푸성귀... 아니 미... 민트 잎을 동동 띄워준다. 급하게 마시면 체를 할까 봐 잎을 띄운 것은 실리콘밸리 스타일이 아니다. 민트를 통해 커피의 끝 맛을 잡아주는 것이 목적이다.
문제라면 잡아도 너무 잡은 게 걱정. 컵 아래에는 민트 잎이 밑장으로 깔려있다. 커피 맛에서 느껴지는 강력한 민트포스.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천국의 맛.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양치의 맛을 선사할 테다.
지난 <노동음료의 역사>에서 소개했다가 경악스러운 반응을 얻은 음료다. 한국사람들의 밥에 대한 사랑이 이렇게 크다는 것을 나도 몰랐다. 콜라를 마시기 위해 치킨을 먹고, 식혜를 마시기 위해 낙지볶음을 먹는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긴 했지만 아무튼.
'소이렌트'를 만든 이들은 식사를 고민하고, 식사를 하는데 들어가는 시간을 아까워했다(한국이고 실리콘밸리고 스타트업은 숨 쉬듯 일해야). 그래서 만든 것이 몸의 필수 영양을 채워주는 음료를 만든 것이다.
소이렌트의 목표는 다이어트, 영양보조 같은 겸손을 말하지 않는다. 그저 '식사의 완전한 대체'를 목표한다. 슬램덩크 채치수 느낌이랄까. 굉장히 대담하고 솔직한 소이렌트의 포부에 실리콘밸리가 반응하기 시작하였다.
지난 오이 스프라이트를 구해준 요원 S는 소이렌트를 정기적으로 직구할 정도의 팬이라고 한다. "지금도 맛은 썩이지만, 초기에는 젖은 상자의 맛이 났었데요." 단점마저 애정 넘치게 말을 하다니. 그는 우편으로 소이렌트 한 봉을 보내주었다. 나의 작은 서랍 속 젖은 상자 맛 음료리뷰는 차후 기대해보도록 하자.
사람은 물을 마셔야 살 수 있다. 하지만 음료만 마시고 물을 마시지 않는 이들을 종종 만나곤 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물은 너무 심심한 맛이 나니까. 과일맛 생수 '힌트 워터'를 만든 카라 골딘도 그랬다. 콜라밖에 모르던 그녀는 물을 마시기 위해서 과일을 동동 띄워서 마셨다. 그러다 건강도 찾고, 사업 아이템도 찾았다는 이야기.
실리콘밸리에도 카라 골딘과 비슷한 사람이 많았던 것 같다. 건강은 찾아야겠고, 음료는 줄여야겠는데, 물은 마시기 싫은 엔지니어들. 그들이 힌트 워터를 찾기 시작했다. 때마침 비타민 워터의 인기가 시들해져서 IT회사에는 힌트 워터가 삼다수... 아니 공식 생수가 되었다.
힌트 워터는 잘 나가는 실리콘밸리 회사라면 항상 비치해놓아야 할 음료가 되었다. 한 번은 트위터에서 앞으로 힌트 워터를 비치하지 않겠다고 하자 회사 직원 한 명이 뉴욕타임스 기자에게 이 천인공노할 이슈를 멘션(메시지) 보내는 일까지 생겼다. 그만큼 사랑을 받고 있다고.
사실 힌트워터의 인기는 카라 골딘의 철학이다. 그녀는 설탕, 방부제 심지어 천연감미료도 넣지 않은 음료를 만들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탄산음료 버전인 '힌트 피즈'와 카페인 버전의 '힌트 킥'도 나왔다.
힌트 킥은 커피나 에너지 드링크 등 야근용 카페인 음료로 고생 중인 사람들에게 좋은 대안이 되었다. 힌트 킥 덕분에 보다 건강한 야근을 할 수 있다니. 아니 그런데 애초에 야근은 건강하지 못하잖아.
힌트 워터는 실리콘밸리를 비롯하여 사회에 음료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있다. 힌트 워터의 뒤를 이어 비슷한 음료들이 나오며 시장이 커지고 있는 중이다. 심지어 마시즘 구독자 중에 한 분도 이걸 꼭 마셔보라고 하셨다. 배송비가 삼다수 25개 가격이었지만 일단 왔다. 정말 목마른 기다림이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주시라.
음료의 맛은 두 군데에서 결정이 난다. 음료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한 번, 음료를 마시는 사람들 사이에서 다시 한 번. 특히나 음료와 사람들의 이야기는 강력하다. 음료를 마셨는데 어떤 사람과 장소가 떠오르고 유대감이 생기는 것은 언제나 '이야기'때문일 것이다.
실리콘밸리가 아니어도 마찬가지다. 우리 삶의 터전에서 환영하고 마시는 음료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 안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있을지를 고민하는 계절이다. 이미 실리콘밸리는 내 책상 서랍에 들어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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