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마시즘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시즘 Apr 26. 2017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

남자를 위한 커피, 이츠 바바

나는 도망치고 있다.

남자답지 못한 나 자신으로부터.


시간을 돌려보자. 오늘 아침, 거래처에 돈을 입금했다. 사장님께 결재서류도 올렸고, 금액도 틀리지 않았다. 짜식 이제 제법인걸. 거울 속 나는 프로 직장인이었다. 거래처에서 ‘지난달에 미리 계산한 돈을 오늘 또 보내주냐’는 전화가 오기 전까지.


이것이 남자의 도주다

한바탕 전화가 오고 갔다. 사장님이 날 산업스파이로 의심하고 있을 무렵, 선배가 캔커피 하나를 건네며 기운을 복 돋아 주었다. “꿍 해있는 모습이라니. 남자답지 않잖아.”


그렇다. 나는 남자답지 못했다. 남자답게 일하기, 남자답게 행동하기, 남자라면 견뎌야 할 책임감을 들지 못했다. 이제 그만 주민등록번호 뒷자리에서 1을 지우러 떠나야겠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물론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게 조용히.


도망치듯 떠난 나의 도피처는 회사 위 옥상이다. 남자답게 멀리 떠나려고 했는데, 여기가 내 배짱으로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이다. 언제 날 부를지 모르니까. 


이것이 남자의 캔커피다

옥상에서 선배가 준 커피를 꺼내어 봤다. 이츠 바바(It’s BABA)라는 캔 커피다. 가히 포장부터 남자다. 에너지 드링크를 연상시키는 청색 배경에 황금색 쉼표. 그 안에 콧수염 난 마초가 표정을 구기고 있다. 처음에는 사장님 얼굴을 박아 넣은 커피인 줄 알고 식겁했다.


남자다운 커피는 이렇게 생겨야 하는구나. 민둥민둥한 내 인중과 구레나룻을 만져 본다. 선배는 많고 많은 캔커피 중에 이츠바바를 내게 준 걸까.


이것이 남자의 입맛이다

선배는 남자라면 에스프레소를 마셔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알기로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남자는 두 부류다. 커피 메뉴를 몰라서 에스프레소를 시켰다가 망신당하는 쪽과 여성 앞에서 허세를 부리는 쪽이다. 둘 다 사약을 마시는 듯한 기분이었을 걸.


과연 그 선배가 준 이츠바바는 어떨까. “네가 남자다워 봤자 얼마나 쓰겠어”라는 생각에 캔 뚜껑을 땄다. 그런데 왠 걸. 향수를 잘못 뿌리고 소개팅에 나온 남자 마냥 캔 안에 진한 우유 향이 가득하다. 마셔보니 부드러운 라떼가 입안을 부드럽게 감는다. 알고 보니 우유가 아닌 생크림을 넣어 달콤한과 부드러움을 살렸다고 한다.


거친 외관과 다르게 맛이 완전 내 취향이다. ‘연한 커피에 달콤하고 부드러운 우유의 맛’ 남자답지 못해 보일까 봐 평소에 말하지 못했는데.


이것이 남자의 휴식이다

그 뒤 이츠 바바를 책상 한쪽에 쌓아 두었다. 자판기나 마트에서도 판매하지 않기에 유니콘 같은 캔커피인가 싶었는데 세븐일레븐에서만 판매했다. 열심히 고생을 해서 이츠바바를 산 이유. 바로 이렇게 쌓아두면 남자답게 보일 것 같아서다. 하지만 그 속에 숨겨진 여리고 달콤한 맛은 나만 아는 비밀이다(가격도 싸다. 프리미엄 커피 같지만 의외로 800원).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가족, 연인, 회사는 여전히 나에게 남자다움을 요구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견디는 것뿐이다. “후, 오늘도 남자다운 척하느라고 수고했어.” 이츠 바바는 마음만은 소년이고 싶은 나를 위로해주는구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