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마시즘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시즘 Jun 08. 2020

우리의 영화는
에너지 드링크 같았지

#에너지 드링크를 너무 마시다가 지구에서 퇴근할 뻔

밤하늘에 떠올랐던 은빛의 거대한 원반을 나는 똑똑히 보았다. 당시 함께 있던 스태프들은 ‘조감독이 나흘간 철야 촬영을 하더니 헛것을 보는구나’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똑똑히 보았다. 드디어 이 세상의 야근을 셧다운하기 위해 외계인님들이 등장했다는 것을 말이다! 영화는 망하겠지만 괜찮아, 어차피 지구도 끝장날 거니까! 



에너지드링크를 마시며

봉준호를 꿈꾸다


내가 그 시골 야산에서 UFO를 본 것도, 팔자에도 없는 독립 영화의 조연출이 되어 개고생을 한 것도 모두 ‘에너지 드링크’ 덕분이었다. 우연히 친구가 쓴 시나리오를 본 것이 화근이었다. 영화 속의 이야기는 물론, 이로 인해 성공할 우리의 미래가 보이는 것 같은 아름다운 시나리오였다. 


문제는 이 화려한 이야기를 구현해 줄 돈이었다. 우리는 핫식스와 레드불로 연명하며 낮에는 시나리오를 쓰고, 밤에는 이리저리 바쁘게 뛰어 500만 원을 모았다. 


20여 명의 배우와 스태프를 데리고(모자람 없는 구성이다), 시나리오의 시대적 배경인 1970년대(완벽한 레트로)를 구현해 줄 두메산골로 떠났다. 촬영이 끝나면 우린 봉준호 되는 거야!



직장이 야근이라면

영화는 야간 작전이야

(재난 영화를 찍으러 온 건지, 재난을 마주하러 온 건지)

시나리오를 쓸 때는 몰랐다. 시나리오상의 아름다운 묘사를 현실에서 구현하려면 누군가는 전봇대에 오르고, 누군가는 엑스트라로 출연할 강아지를 구하기 위해 시골 동네를 개처럼 뛰어야 한다는 것을.


문자 그대로 총체적인 난국이었지만, 우리가 머리를 맞대고 쓴 시나리오의 가장 큰 문제는 멋 부리겠다고 모든 장면을 밤으로 설정해 놓은 것이었다. 우리는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낮에는 누가 이런 장면을 썼냐며 서로 손가락질하다가 밤이 되면 미친 듯이 촬영을 진행했다. 피곤에 찌든 스태프와 배우가 흐느적흐느적 논두렁으로 이동하는 걸 보고 있노라면,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의 아비규환과 다를 바 없었다.


그곳에서 촬영 현장을 이끌어야 하는 조감독이었던 나는 정신을 단단히 차려야 했다. 하지만 밀려오는 졸음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일보 직전에 제작팀 친구 한 명이 가방을 열었다. 그 가방 안에는 시중에 존재하는 모든 에너지 드링크가 담겨 있었다. 박카스, 레드불, 몬스터 에너지…… 가방 하나를 이걸로 채워 왔다고!



음료들아

내게 에너지를 나눠 줘!

(단계별 처방과 같았던 스팀패.ㄱ...아니 에너지 드링크)

제작팀 스태프는 종류별로 에너지드링크를 하나씩 배급해 주었고, 나는 무인도에 표류한 사람이 식수를 아끼듯 에너지 드링크들을 며칠에 걸쳐 조금씩 분배하며 마셨다. 너무 많이 마시면 한 번에 피로해질 수 있으니까, 카페인이 적은 것부터 조금씩 마시겠노라 다짐까지 했다. 


나흘째 밤이 되었다. 이제 남아 있는 에너지 드링크는 오직 몬스터 에너지뿐이었다. 이 녀석의 명성은 익히 알고 있었다. 핫식스나 레드불이 동네 축구라면 이 녀석은 미식축구 같은 녀석이랄까? 카페인은 물론 각종 비타민과 에너지 블렌드 성분이 압도적으로 함유되어 있어 졸음이 오는 정신을 발로 차(?) 버린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몬스터 에너지를 마셨다. 그날은 다행이도 숲 속 얼어 버린 강가 위에서 귀신 같은 걸 보는 장면이었다. 그런데 왜, 귀신은 안 보이고 UFO가 보였던 걸까. 치려던 슬레이트를 내리고 계속 눈을 비빌수록 UFO는 더 선명하게 보였다. 감독이었던 친구는 슬레이트를 기다리다 못해 내 어깨를 흔들었다. 아아, 눈앞에 UFO가 보였다.



삶은 야근과 야근 사이의

음료가 아닐까


그날 밤 UFO는 진짜였을까? 감독은 조감독의 눈에 CG가 쓰였다며 나를 열외시켜 주었다. 에너지 드링크를 하루걸러 하나씩 마셨을 때는 괜찮지만, 며칠 연달아 몰아 마시면 지구를 떠나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야간 촬영도 해가 뜨면 끝이 나듯, 영화 역시 어떻게든 끝이 났다. 감독이자 배우인 동시에 스태프였던 이들은 이제 형 동생 하는 친구들이 되었다. 영화가 끝난 뒤 야간 알바를 시작했다는 제작 팀 스태프를 찾아가니 녀석이 씩 웃으며 말했다.


(요즘은 이 녀석의 시대더라고요)


“형 요즘에는 몬스터가 아니라 이게 진짜라던데요. 스누피 커피 우유.”



해당 원고는 문화 매거진 <언유주얼 An usual 8호 - 퇴근 퇴사 퇴짜>에 기고한 원고입니다(마시즘과 언유주얼 양측의 허락을 받아 올립니다). 언유주얼에서는 마시즘의 인생음료 에세이는 물론 다양한 덕후, 작가들의 글을 만날 수 있어요!

매거진의 이전글 코로나19를 맞이하는 음료회사의 변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