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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델리러브 Nov 22. 2021

아파트라는 작은 사회에 적응하기

가까이하기엔 내게는 너무 먼 인간관계, 아파트 이웃

동네에 있는 버거킹은 창 끝 쪽으로 일인용 좌석들이 있다. 의자 두 개를 두었지만, 혼자 앉아 트레이를 올려놓고 먹기에 딱 맞는 자리이다. 그래서 가끔 그곳을 카페처럼 이용했다. 와이파이가 되지 않기 때문에 급히 일을 처리할 때 카페처럼 들려서 일을 했다. 그날따라 다행히 남편이 일찍 퇴근했고 나는 저녁 무렵 버거킹을 향했다.



한참 일을 하다 보니 2층 좌석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했다. 그때 저벅저벅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저녁 7시 반이 넘은 시각, 간결한 발자국 소리의 정체를 확인해 보니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3남매 엄마이다. 아이들 없이 홀로 (약간 늦은) 저녁 식사 시간에 이곳을 찾다니 무슨 일이 있는 걸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그보다 인사를 해야 하나 마나 고민이 들었다. 자리가 좀 떨어져 있었고, 나는 모자를 눌러쓴 채 노트북에 코를 박고 일하는 자세였다. 그녀는 나를 못 알아본 건지 알면서도 모른척한 건지는 모르겠다. 나만이 감지하는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스치듯 아는 관계라면, 잡아다 아는척하는 것도 오지랖이 아닐까. 잠시 고민하다 나는 과도한 업무량으로 인해 주변이 보이지 않는 포스로 일을 했다. 노트북 넘어 힐끔힐끔 그녀를 감시 아닌 감시를 하면서. 



햄버거를 한 입 베어 물고, 멍하니 창을 바라보는 그녀는 단언컨대 육아로 인한 고충이 아닐까 짐작한다. 그녀가 처음 이 아파트로 입주했을 당시 표정을 아직도 기억한다. 미간을 찌푸린 채 화가 난듯한 눈빛. 항상 화를 품고 있는 듯한 표정으로 인해 그녀를 가까이하기엔 그 장벽이 너무 높았다. 게다가 당시엔 길 가다 성내며 아이들에게 화를 내는 모습도 종종 보았다.



그럼에도 셋을 키우니 힘들 거야라고 그녀를 이해했고, 나는 이해의 방식을 적당한 외면으로 처리했다.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않은 한 인사하지 않았다. 굳이 인사를 한다는 게 오히려 불편함을 유발하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는 그녀의 인사 방식을 해석하다 나온 결론이다. 그녀와 나는 아는 사이지만, 몰라도 어색하지 않은 관계인 것이다. 이를테면 동네 마트 근방 멀리서 그녀가 온다. 약간의 거리가 있지만, 그녀는 내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목을 까딱하는 방식으로 인사를 한다. 



"끄덕"보다 짧은 순간, "까딱"

인사를 하긴 했는데 뭔가 미진한 까딱 인사법.



하지만 고개를 내릴 땐 목에 디스크가 걸리진 않을까 할 정도로 약간의 과도하게 턱과 목뼈가 접촉한다. 그 찰나의 순간에 그녀가 내게 인사를 한 것이다. 나는 한 3초 정도 뒤늦은 부팅을 했고, 슬로비디오처럼 천천히 고개를 숙이자 그녀가 내 옆을 지나쳤다. 어떤 관계인지 정의 내리기도 어색한 사이인 것이다. 아파트에 살다 보니 그런 이웃들은 다량 생산된다. 3년 차가 넘으니 얼굴은 알지만, 초반 인사 타이밍을 놓쳐 인사를 하지 않는 관계도 있고, 초반에 우연히 인사를 하게 되면서 지속적으로 인사를 해오고 있지만 어색함이 가득해 가끔은 모른 척하고 싶은 사이도 있다. 또한 초반엔 인사도 하고 연락도 했던 사이지만, 점점 각자의 방식으로 이웃들을 접속하면서 겨우 인사만 하는 어색한 사이도 있다.



특히 나의 옆집의 경우 더욱 그렇다. 어떻게 내 카톡을 알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입주민 카페 때문이었는지) 입주하고 얼마 안 돼 카톡이 왔다. 시간 되면 차를 마시자는 제안이다. 그래서 어린 둘째를 안고 갔는데 대화는 계속 정적이 흘렀다. 그녀는 먼저 만나자고 제안했지만, 대화를 주도하진 않았고, 별다른 얘기도 없었다. 결국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나는 이런저런 괜한 말들을 쏟아붓다 왔다. 그 이후, 다시는 옆집을 찾진 않았지만, 가끔 책이나 감자 등의 채소들이 한 박스씩 생기면 서로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코로나로 인해 고립감이 과해질 무렵, 첫째가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놀이터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첫째의 같은 친구들에 등장과 둘째의 같은 반 어린이집 친구들도 자주 만난다. 그러다 보니 인사를 하는 횟수가 늘었다. 어색했던 인사만 주고받던 사이도 이제는 약간 좀 더 진전된 일상을 얘기하게 된 사이도 생겼다. 그러면서 마음이 좀 풀린다고나 할까. 아파트라는 공간에서 고립감에 빠져 지냈던 초반과는 달리 지금은 여유가 생겼다. 예전 같으면 불편했을 상황도 이제는 불편하지 않게 되었다.



3남매 엄마는 이제 내게 자신이 싸온 간식을 권하며 인사하는 사이가 되었다. 까딱 인사도 이제 하지 않는다. 집에 잠깐 올라갈 일이 생기면, 놀이터에서 둘째를 잠깐 맡기고 올라갔다 온다. 옆집 엄마는 여전히 인사만 하는 사이지만, 내가 없는 사이 울던 첫째를 돌봐주기도 했다. 갑자기 왜 이런 반전이 생겼는지는 모른다. 당연하게도 관계란 물리적인 접촉과 시간에 비례하기 때문이 아닐까.



자주 보니 각자에서 데이터로 자연스럽게 입력이 된다. 길 가다 쟤는 누구 동생, 누구 형이라는 카테고리가 형성된다.  더는 가깝게 다 가려하지 않아도 접속이 이뤄지는 순간이 펼쳐지기도 한다. 나의 노력이 아닌 아이들 간의 접속이 이뤄지는 순간, 발생하는 효과이다. 아이들끼리 아는 사이가 되면, 그 아이들이 나를 아는척하고, 나는 그들에게 인사를 한다. 한 번은 첫째 친구에게 손들어 인사하니 그 아이도 내게 손을 들어 인사를 해줬다. 편의점 앞에서 알코올 중독자가 아이들에게 욕설을 하는 순간, 놀이터 죽돌이(?) 그 아이들은 앞에 있던 나에게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들려주었다. 



문득 아파트 단지가 작은 사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만의 인간관계가 있고, 이곳만의 이벤트가 있고, 이곳만의 커뮤니티가 있으니. 그것이 배타적인 형태만 지니지 않다면, 아파트에 사는 것도 불편하거나 답답하기만 하진 않을 것 같다. 특히 아이가 있는 집의 경우, 동네 놀이터에서 얘들 보기 힘든 반면 이곳 아파트에선 아는 얼굴의 아이들이 거의 매일 나와 놀이터에서 놀고 있으니 어떤 면에선 맘이 편해진다. 놀아야 할 나이에 또래와 놀지 못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기에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본다. 놀면서 싸우기도 하겠지만, 이 또한 경험이고, 그런 경험 속에서 사회적인 적응 능력을 배우는 거니까.



아파트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친구가 있다. 그런 곳에서 답답하게 어떻게 사냐며 이젠 자신은 빌라가 편해졌다고 한다. 어디에 살든 본인의 선택이니 뭐라 논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이 그립다 가도, 층간 소음에 신경 써야 하는 아파트 라이프가 불편하다가도,  다수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또 다른 사회적인 공간인 아파트가 실만 있는 게 아니라 여러 득도 많다는 걸 깨닫는다. 물론 지금도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어 친구처럼 친해진 관계는 없지만, 딱 이 정도라도 괜찮다. 이렇게 생각하니 갈팡대던 내 마음에 갈피를 잡아가면서, 고립을 자처했던 아파트 라이프에서 푸르른 싹이 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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