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쯤 본연의 존재로 서로가 서로를 확인할 수 있을까
어쩌면 아기에게 필요한 건 엄마의 따뜻한 시선일지 모른다. 소아과에서 내내 스마트폰을 건네는 젊은 엄마도 할 말이 없는 건 아니다. 아기에게도, 엄마에게도 사연이 있다. 그 사이에 스마트폰이 있다. 스마트폰을 보라고 강요하는 엄마는 아기가 보여달라 칭얼대니 주는 거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아기는 놀아달라 떼를 쓰는 건데 엄마는 스마트폰이나 과자를 건네주니 속이 타들어갈 지경 일지 모른다. 스마트폰으로 정적의 시간이 어느 정도 유지되지만, 결국 터질 건 터진다.
아기는 소통을 하고 싶은지 모른다. 혼자서 고독을 견디기엔 아직 그 느낌을 받아들일 수 없다. 자극이 필요하다. 자극을 만나고 싶지만, 매번 같은 신호를 보내는 엄마가 답답한 것일지 모른다. 옆자리 아기처럼 그냥 스마트폰에 빠져들까 고민도 한다. 하지만 아기는 재미없다. 뽀로로와 타요도 결국 한 순간이다. 그들의 시대가 끝나면 다른 시대를 올 것이고 아기는 새로운 시대를 만나고 싶다.
엄마는 사실 귀찮은 마음도 있다. 독박 육아하는 것도 지겹고, 동네 엄마들과 얘기하는 게 그나마 숨통 트이는데 그마나 스마트폰이 있어서 숨쉬고 사는 거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요즘 감기가 유행이라 아기는 이미 2주간 어린이집에 가지 않았다. 집과 병원을 오가는 일상이 지루하다. 엄마의 열정은 육아로는 온전히 해소할 수 없는 영역이다. 젊은 엄마는 마음 속으로 생각한다. 뭔가 새로운 일도 하고 싶고, 새로운 걸 배우고 싶기도 하고, 동네 엄마들과 맘 편히 얘기하며 사는 일상을 꿈꾼다. 하지만 육아가 장벽이 되고 있는 느낌이다. 아기는 이쁘지만, 종일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복잡하다.
그렇다면 아가는 언제 본연의 엄마를 만나게 되는 걸까. 엄마는 심란한 마음 없이 본연의 아기를 만날 수 있는 걸까. 언제 아기와 엄마는 교감하며 상호 소통하며 함께 성장하는 걸까. 비대면 시대지만, 인류는 물질의 시대에서 완벽하게 떠나올 수 없다. 여전히 눈에 보이는 것을 믿고 산다. 아직까진 서로의 살갗과 숨결을 느끼며 눈앞에서 확인하는 관계에서 더 친밀함을 느낀다. 같이 있어도 스마트폰을 사이에 두고 서로 다른 생각에 골몰하면, 그 관계는 진전이 없다.
관계에 진전을 바란다면, 마주 보고 함께 손도 잡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아기는 칭얼대는 것일지도 모른다. 만지고 싶은 세상에서 여러 자극을 엄마와 함께 하고 싶은 것인지 모른다. 뽀로로나 타요는 실체가 아니니까. 환영 속에서 아기는 쉽게 흥미를 잃어버린다. 결국 그 세계에서는 더 센 자극을 찾아야 생존이 가능하다. 아기는 결국 울음을 터트린다.
인간은 원래 아날로그적이라고 한다. 인간의 여러 감정 중에, 이를 테면, 분노라든가 불안 등은 살면서 쌓이게 된 감정들이라는데... 생존을 위해 불안을 느끼고, 분노를 하게 작동되어있는 것. 먹잇감을 찾는 것부터 먹잇감이 되지 않기 위해 항상 불안을 바탕에 깔아 두며 살아온 인간들이니까. 비대면도 좋지만, 고립된 지금의 생활도 나쁘진 않지만, 가끔 실체를 가진 것들을 마주할 때면 그 감흥이 잊히지 않느다. 이집트 피라미드를 맨날 영상으로만 보면 무슨 감동이 있을까. 광활한 땅 위에 솟은 세 개의 뾰족 봉우리들을 실제로 마주해야 하는 것처럼, 그 느낌은 분명 다를 것이다.
마주하는 순간, 좀 더 진실에 다가서는 것 같다. 아기와 엄마도 그 과정에 있다. 마주하고 자주 부대껴야 서로에게 가족이 된다고 생각한다. 가족은 한 집에 산다고 가족이 아니니까. 어쩜 이것이 인류의 생존 욕구일지도 모른다. 생존을 위해 우리는 마주해야 한다. 만나야 한다. 아기에게도 엄마에게도 그 방법이 이롭다. 친밀해지면 아기도 울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아이의 울음이 줄어들면, 엄마도 육아가 수월해질 것이다. 시간이 필요해도 그 방법이 낫다.
우리는 인간이니까. 인류는 생존 욕구를 가동하며 살아왔다고 한다. 대면 사회가 여전히 필요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그마저도 사라진다면 인간은 다른 모습으로 진화할 것 같다. 필요한 영역만 극대화된 괴물처럼. 아니 로봇처럼. 그러므로 물리적인 인간적인 삶을 외면해선 안될 것 같다. 인간이 지닌 오감 중 하나인 촉각이 상실하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