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존재가 깨어있는 순간
새벽은 나의 존재가 깨어있는 시간이다. 아이들과 분주하게 보내던 시간들도 저물고, 잠시 눈을 감는다. 5시면 일어나 정신을 깨운다. 몇 년째 나의 새벽은 온에어 중이다. 늘 바쁘다. 우리 집에 사는 사슴벌레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새벽은 인간의 늦은 오후 일지도 모른다. 한참 활동 중이라 분주하게 소리를 만들어낸다. 그들의 움직임은 역동적이다. 사육통 뚜껑에 붙어있거나, 곤충젤리를 다 뒤집어놓고, 놀이목도 이끼로 덮어버린다. 작은 사육장 안이 그들이 아는 세계의 전부이기 때문일까. 그들은 그 안에서 생을 살아간다. 먹고 놀고 움직임을 지속적으로 반복하면서 하나하나 미세하게 세상과 조우하려고 한다. 하지만 사육장 안은 좁고 밀폐된 곳이다. 사슴벌레들의 상상력을 제한한다. 그래서 나는 볼 때마다 마음이 좀 무겁다.
사실 나도 새벽 시간을 분주하게 움직인다. 보통 눈을 뜨면 집안 정리를 한다. 먼저 설거지를 전날 못했을 경우, 서두른다. 물소리가 거실을 가득 메운다. 물이 흐르고, 그릇들이 삐걱댄다. 식기세척기 안으로 그릇들을 정렬한다. 적당히 채운 후 전원 버튼을 누른다. 식세기의 소음은 적당하다. 귀에 거슬릴 정도의 소음이 발생하지 않아 새벽에서 사용 가능하다. 이제 거실이 남았다. 기실은 아이들이 커감과 동시에 청소의 난도가 낮아지고 있다. 다행이다. 이제는 장난감을 거실에 부워 놀지 않는다. 다만 그림을 그리고 놀았을 경우, 종이가 날린다거나 색연필이 바닥에 구르는 정도에서 어지럽다. 이 정도면 괜찮다. 식탁에 쌓인 책은 그냥 책꽂이에 꽂으면 된다. 도서관에 반납할 책도 구분한다. 아이들과 주말에 종종 도서관에 간다. 버스를 타고 가서나 걸어서 가는데 덥다 보니 버스를 타야 할 것 같다.
이제 관건은 커피이다. 커피머신은 굉음소리가 난다. 새벽을 뒤흔드는 소리이다. 가끔 잠귀 밝은 둘째는 이 소리에 잠이 깨기도 했다. 어제는 늦게 잤으니 그 어떤 소음에도 끄덕 없이 잠을 자지 않았을까. 도전해본다, 아주 가끔, 그냥 물로 때우는 경우도 많다. 대략 정리하고, 물 한잔 또는 커피 한잔을 식탁 위에 올려놓는다. 앗, 그러고 보니 깜빡하고 쌀을 씻지 않았다. 일단 물에 불려야 한다. 쌀을 꺼내 물에 불린다. 중요한 작업이다. 밥이 있어야 대처방안이 생긴다. 모든 작업이 끝나면 취사 버튼을 누르면 된다.
드디어 노트북 앞이다. 집중하는 시간이다. 밤에 늦게 자서 5시 반에 일어났다. 3시 가까운 시간에 잤으니 좀 피곤하다. 그럼에도 아침 바람을 맞이해야 한다. 여름 아침은 고요하다. 내가 사는 동네는 더욱 그렇다. 차들만이 도로를 누빈다. 그 와중에 다니는 차도 몇 대 없다. 고요하지만 이미 밖은 환하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세상은 더 일찍 깨어난다. 바람이 지나는 길목마다 생명이 있다. 천변 주변으로 곤충들과 꽃들은 이미 깨어나 하루를 시작했다. 저들에게도 하루라는 개념이 있을까에 대해 잠시 골몰한다. 하루라는 개념보다 생이라는 보다 넓은 단위를 사용할 것 같다. 현존에 충실할 뿐이다. 그것이 바로 생이니까. 그들에게 하루는 생 그 자체니까 구분 없이 충실히 살아간다. 때가 되면 교미를 하고, 때가 되면 꽃을 피운다. 또 때가 되면 싹을 틔우고, 때가 되면 번데기가 된다. 그 때라는 건 그들만이 안다. 그들 안에 내재된 DNA가 곧 몸의 언어가 된다. 몸으로 표현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을 부지런히 가동해 그 결과물을 몸으로 보여준다.
사슴벌레들은 여전히 바쁘다. 그렇게 잘 놀다가도 순간 때가 되면 몸을 뒤집는다. 처음엔 눈물이 쏟아졌다. 사체와 함께 집안에 있다는 생각을 하니 무서웠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여전히 나를 사로잡았다. 사실 우리 주변에 널리고 널린 게 죽음인데. 살아있다는 게 더 신기하게 세상인데 말이다. 얼마 전, 애사슴벌레 수컷이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번데기 방에서 우화한 애사슴벌레 수컷을 꺼내다 턱이 다친 아이였다. 첫째는 마음이 아팠다. 도저히 키우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다만 나에게 양도했다. 잘 봐달라고, 자기는 볼 수 없다고, 한 시간 넘게 울던 첫째는 그런 방식으로 애도를 했다. 사슴벌레들의 수명은 2년 정도라고 본다. 길지 않은 생이다. 그전에 죽을 수도 있다. 자연에서 태어났다면 천적의 먹이로 금세 생을 마감할 수도 있다. 치열한 피비린내가 나는 생의 열전. 그들은 기를 쓰고 살되 억지로 하지 않는다. 다만 생을 유지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 위험이 닥치면 빨라진다. 곤충들에게 생은 종종 빠른 전진을 요구한다.
그에 비해 인간은 얼마나 마음만 분주한가. 나란 존재가 그동안 마음으로만 우주 끝까지 비행하고도 남을 번민과 고통 속에서 살아왔다는 걸 깨닫는다. 그저 계단을 오르고 거실 청소를 하고 새벽에 일어나 기지개 한 번 하면 털어낼 수 있었을 삶의 무게를 오래도록 짊어지고 살아온 것이다. 몸의 언어와 마음의 언어는 하나이되 마음이 무거우면 몸을 움직여 마음을 이동시켜야 한다. 마음이 작동하기 시작하면 몸은 한결 가볍다. 마음이 움직이려고 할 때 몸이 무거울 때도 있다. 이는 분명 어딘가 아프다는 신호이다. 보이지 않는 상처가 침투 중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천근만근 무거워도 새벽 기상을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일단 무기력이 찾아오지 않게 나를 단속해야 한다.
새벽 시간은 그런 나를 단속하는 시간이다. 생을 분주하게 가동시키는 배경음을 들으며 나도 생의 감각을 찾아간다. 나에게 맞는 감각에 손을 뻗는다. 숨을 고르게 쉰다. 마음을 가다듬고 몸을 일으킨다. 새벽이 오면, 나는 으레 잠자고 있던 나란 존재가 유의미한 시간을 지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집안을 정돈한다. 맥북의 자판 소리가 울린다. 생의 상태를 확인하는 작업이다. 글이 이를 대변해준다. 지금 나의 상황에 대해. 나의 글이 또박또박 모니터 위로 박힐 때 나는 안도한다. 하루를 살아가는 힘을 얻는다. 분주한 소리들도 이제 잠잠해졌다. 그들도 고요히 세상을 맞이하고 있는 모양이다. 어쩌면 내가 내는 소리가 시끄러워인지도 모른다. 깨어있는 존재들과 생존여부를 확인하는 시간이 바로 새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