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최선이 불러일으킨 불협화음에 대하여
아침부터 최선을 다해 요리를 한다. 첫째와 둘째가 좋아하는 메뉴 그 사이의 교차점을 찾아 둘 다 잘 먹을 수 있는 요리를 찾는다. 아니면, 두 가지를 동시에 해야한다. 아이들의 입맛은 제각각이어서 상황이나 당시 기분 상태, 분위기에 따라 섭취량도 다르고 반응도 다른다. 그러다 남편까지 끼면, 나는 세 명을 동시에 만족시켜야 하는 메뉴를 찾는다. 세 명에게 동시에 매우 만족스러운 요리를 찾는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게 최선을 다해 요리를 하면, 둘 중 한 명은 시들하거나 둘 다 적당히 먹다 말곤 한다. (최근 만든 카레는 둘 다 안 먹음. 남은 카레는 남편 몫) 오히려 아무 기대 없이 남는 재료로 후다닥 만들어주면(예를 들어 잔치국수), 왜 이렇게 맛있냐는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최선을 다한다고 해서 항상 좋은 결과를 얻은 건 아니다. 오히려 과도한 최선은 불협화음을 만들어낸다. 특히 나의 문제는 일할 때 과도하게 집중한다는 것. 하여, 나의 최선이 주변인들에게 불편함을 준다는 것이다. 적당히 해도 되는 일을 과몰입해 에너지를 쏟아붓는 걸 보면, 상대방 입장에선 불편한 감정이 솟는 것이다.
"쟤는 뭔데 저렇게 일해."
마치 자신의 영역을 침범당한 것처럼 불편한 것이다. 보편적인 평준화된 삶을 바라는 이들에겐 나의 과도함은 일에 있어 예기치 못한 장애물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일을 잘 해왔다고 장담할 순 없다. 오히려 나는 실수도 많았고, 많은 실패를 겪으며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경우가 더 많았다. 최선을 다한다고 좋은 결과가 양산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뒤돌아 생각해보면, 나는 왜 그렇게 워커홀릭이 되어 일에 집중했을까? 나는 무조건 일은 잘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밤낮 가리지 않고 일했을까? 그러면서 나의 결과물은 형편없었을까? 왜 나는 최선을 다하려고 했을까?를 고민했다. 아마도 불안 때문일 것이다. 혹시나 이 일이 나 때문에 잘 못 될까 봐 전전긍긍하는 마음으로 일을 마주했다. 잘 못되지 않기 위해 나는 항상 양들을 울타리 안에 가뒀다. 가끔은 초원에 풀어놓고 자유도 줘야 했었는데... 그러다 양을 잃어버리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결국 양을 내 시야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가둬둔 것이다
자유로운 상상이 부재한 일은 성과가 좋을 수 없다. 하지만 나는 항상 숲보다는 나무에 집착했다. 나의 지식은 확장하지 못했다. 물론, 나의 일은 때때로 성과를 냈지만, 때때로 실패했다. 100%는 실패는 아니었지만, 그에 반해 술렁술렁 일하는 것 같은 후배는 평판도 좋았고, 일도 잘 해냈다. 최선을 다해 온 시간을 일에 투자하지 않았지만, 후배는 사회적으로도 인정받으며 지금도 일을 하고 있다.
요즘 채사장 책에 빠져 과거 그가 썼던 책들을 찾아보고 있다. 그중 한 부분에서 무릎을 쳤다. 나의 시야가 좁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 별 모양의 지식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별 모양의 지식이 담겨진 책을 읽으면 될까요?
한 번에 읽으면 안 될 것 같으니 여러 번 반복해서 읽어보는 거죠.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방법으로는 별이라는 지식을 얻을 수 없어요. 지식은 그런 방법으로 얻을 수 없어요.
삼각형이 그려진 책, 사각형이 그려진 책, 원이 그려진 책. 이런 책들을 다양하게 읽었을 때
삼각형과 사각형과 원이 내 머릿속에 들어와 비로소 별을 만드는 것입니다."
- 채사장 저서 '우리는 언젠가 만난다' 중
그렇구나. 내 일이 왜 실패를 했는지 나는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마치 일방통행하듯이 하나의 길로만
계속 다니니 옆길로 이어지는 새로운 길을 만나지 못한 것이다.
다시 책에 집중하는 시간이 도래했다. 나의 지식이 낡은 이유는, 내가 점점 더 꼰대와 가까워지고 있는 이유는
바로 별에만 집중했기 때문이다. 세상엔 다양한 모양이 있고, 그 모양들을 하나씩 새길 때 우리는 도형의 세계를 이해하게 된다. 최선을 다해 한 우물만 파기보단, 가끔은 쉬엄쉬엄 우물도 파보고, 샛길로 새서 새로운 여행을 해도 된다. 잘 못 든 길이 지도를 만들듯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