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언어는 어떻게 탄생하는가
26개월 된 둘째는 언제 말문이 트였나싶을 정도로 갑자기 어휘력이 증가했다.
지금은 언어 폭발시기.
매일 밤마다 안방 통창을 열고 자는데 오늘따라 공기가 안 좋았다. 그래서 문도 닫을 겸 벌레 들어오기 때문에 방에 불을 켠 채 문을 열면 벌레가 들어온다고 설명했다. 방범창이 있지만, 둘째 녀석이 장난감으로 구멍을 몇 개 뚫어놨기 때문에 실제로 벌레가 들어올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아이는 곰곰이 생각하다 말을 뱉어냈다.
도대체 이 상관없는 말들의 나열은 무슨 의미일까. 한참을 웃었다. 그러다 잠을 자기 위해 누워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첫째가 자꾸 나와 동생을 장난감이라고 부르면서, 장난감이 안 움직인다는 둥 이런 장난감을 누가 사 왔냐는 둥 이런저런 얘기를 반복했다. 요새 토이스토리를 몇 번 보더니 이런 식으로 응용하는 것이다.
그러다 갑자기 나에게
그 말에 나는
"그럼 유준이랑 안 놀아도 되겠네"했더니 첫째가 울기 시작했다.
엉엉엉~ 세상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울고 불고... 진심 울고 있었다.
왜 우냐고 물어보니
그렇구나. 아이에게 자기와 놀아주지 않는 말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말이 될 수 있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그 옆에서 가만히 상황을 듣고 있던 둘째가 한 마디 한다.
하면서 앙앙 우는 흉내를 낸다.
이 말에 첫째와 내가 웃었더니 이번엔
26개월이라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농담도 잘하는 아가아가. 그러다 금세 잠든 첫째 옆에서 둘째는 아직도 꼼지락 댄다. 이내 취침 의식을 한다.
이 시기 아이들의 언어에 특징이 있다면 도치법이 아닐까 ㅎㅎㅎ 자신의 요구사항을 확실히 말한 후, 발가락을 하늘로 향하게 한 뒤 나를 기다리고 있다. 자기 전, 아프기 코스프레를 하는 이유는 뭘까. '엄마, 나 좀 더 많이 봐주세요'라는 의미일까. 어제는 연고를, 오늘은 밴드를 붙이고 나서야 고이 잠든 아가. 좀 고단해도 둘째가 아니었으면 삭막해진 내가 얼마나 더 감정이 메말라갔을까 생각한다. 아이의 말이 내게 물이 되어주니 나는 더 이상 고사상태가 아니다.
첫째를 키울 때와는 달리, 둘째가 주는 위로가 분명 있다. 게다가 둘은 비슷한 듯 다른 성격이다. 첫째가 좀 더 예민하다면 둘째는 그에 반해 순한 편이다. 둘 다 한고집하지만, 그래도 둘째를 보는 게 더 수월하다. 감정노동이 덜 하기 때문이다. 첫째는 요구사항이 많고, 즉시 들어주지 않으면 반응이 격하다. 매번 그로 인해 나는 피로감을 호소했다. 둘째 역시 요구사항이 많으나 계속 붙어서 놀아달라 요구하지 않고, 혼자서 잘 놀기도 한다. 그 덕분에 나는 간단한 집안일도 하면서 아이를 돌본다.
하지만 나이가 드니 체력이 달려 육아에 더 지쳐간다. 게다가 나는 전보다 인내심도 더 줄어든 것 같다. 목소리가 높아지는 경우도 더 많아진 것 같다.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평정심을 찾을 수 있도록 단련하는 게 필요하다.
하나,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아이를 잘 돌보는 것과 글쓰기는 별개인 것 같다. 육아책에서 배운 대로 아기를 능숙하게 잘 대하는 것처럼 인생에 접근한다면 뭔가 수상하다. 글쓰기 관련해 무수히 많은 책들이 있지만, 결국 지속적으로 쓰는 것만이 글을 쓸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 것처럼 몸으로 때워야 하는 것들이 있다. 그것들은 무릇 오랜 시간을 요구한다. 그렇다고 긴 시간 동안, 같은 잣대로 세상을 바라보면 진전이 없다. 행복한 글쓰기 이면엔 불편한 현상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삐딱할 수도 있는, 자기만의 시각, 세상을 해석하는 방법들이 요구된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 같다.
세상의 오만가지 표정을 읽고, 포착하고, 해석해내면서 글이 탄생한다. 글은 익숙한 곳에서 불편하게 자생한다. 익숙한 글들은 눈에 잘 들어오지만, 기억에 남지 않고, 오히려 끝까지 읽어나가기 힘들다. 너무 쉬운 글이 불편한 이유이기도 하다. 쉬운 글이 나쁘다는 건 아니다. 다만, 독해라는 독자의 영역을 남겨두지 않은 채 풀어진 실타래처럼 실마리를 다 보여주는 건 흥미를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이는 대부분의 문학작품들이 가장 멀리하는 말하기 방식이다.
아이가 기존에 말하던 방식이 아닌, 그날 배운 어휘로 새로운 문장을 탄생시키듯, 그 문장이 기존에 알던 익숙함이 아닌, 낯선 나열이라 입에 배진 않지만, 하다 보면 또 자기화되는 말처럼 말이다. 나는 그것이 언어의 재창조라고 생각한다. 언어가 천지개벽을 일으키는 어떤 시점이 되면, 글이 완성된다. 그 글은 작품이라 불릴 수 있을 만큼의 가치를 스스로 부여한채 탄생한다고 믿는다. 그렇게 조금씩 누군가 부여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작가가 된다. 그렇게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