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으로 우리가 기억하는 것

너와 나의 기억이 평등하지 않음을 알게 하는 암호말

by 델리러브

나는 아직도 기억해. 초등학교 2학년 때 우리가 빚어낸 우정이라는 어떤 무형의 기억을. 작은 너희 집 마당에서 조곤조곤 놀던 시간들과 너희 엄마가 해주신 간식, 그리고 하굣길에 같이 간 가정집 떡볶이 가게에서 30원어치의 떡볶이와 오뎅국물까지 그 기억을 우리는 함께했지. 피아노가 배우고 싶다고 해서 찾아간 어느 교회 부속 피아노 학원에서 나는 근 3년간 피아노를 배웠고, 너는 배우지 않았지. 지금 생각해보면, 너에게 나는 낚인 것이다. 마치 재물처럼 너는 그 현장에 나를 버리고 사라졌어. 거절을 배우지 못했던 9살 소녀는 그 다음날부터 피아노를 배웠지. 피아노를 꼭 배우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는데 말이야. 그 시절, 너는 내 이름을 불러줬어. 학기 초, 나의 이름을 정확하게 기억해 주었고 우리는 친구가 되었어. 초2였지만, 너의 꿈은 좋은 대학에 가는 것. 묵묵히 듣는 걸 잘하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실제로 너는 공부도 잘했지.



평온한 초딩 인생에 어느 순간 먹구름이 꼈던 순간은 아직도 선명해. 당시 담임선생님이 출산으로 휴직을 하시고 건장한 체구의 나이 든 남자 교사가 담임을 맡았지. 아마도 기간제 교사였던 것 같아.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선생님은 가끔 이런 식의 땜질이 필요한 자리에 종종 우리 학교를 찾았지. 그때나 지금이나 기간제 교사라는 게 편치 않는 자리겠지만, 어린 시절엔 그저 다 같은 선생님이었지. 우리는 선생님이라고 불렀어. 나를 어둠으로 소환하는 그 이름도 기억나. 어찌 됐든 선생님의 이름은 기억하되 발화할 수 없는, 어린 우리에겐 높으신 분이었어.



그 교사는 별다른 수업을 하지 않았어. 주로 자습 시간이 많았지. 그리고 그 자습시간은 항상 조용하길 바랐지. 한치의 소음도 용납되지 않았어. 2학기 때 반장이 된 너의 주된 업무는 자습시간에 떠든 아이 지목해서 불러내기. 그날 나는 뒷자리에 남자아이가 자꾸 장난을 걸어왔어. 내 긴 머리를 자꾸 잡아당겨서 나는 기분이 좀 좋지 않았어. 처음에는 좋은 말로 했지만, 나중엔 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얘기했지. 그때였어.



"장소형, 나와"



앞으로 나는 불려나갔지. 그리고 기간제 교사는 사정없이 내 두 뺨을 자신의 거대한 손바닥으로 갈겼어. 빨갛게 부은 볼은 아프다기보다 부끄러웠어. 나의 이름을 호명하던 너. 원망하지 않았지만 뭔가 불합리하다는 생각이 들었어. 하지만 그 감정의 상태를 설명할 수 없었던 어린 나이였지.



그 이후, 너와 나는 같은 반이 된 적이 없었지. 그러던 초5였나 초6이었나. 쉬는 시간, 누군가 나를 불렀어. 내 이름은 아니었지만, 분명 나를 부른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어.



"야!"



갑자기 수업이 변경되는 바람에 교과서를 준비하지 못했다고 했지. 너에게 필요한 건 교과서이지 내가 아니었어. 너와 나의 기억은 평등하지 않았어. 너는 나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지만, 나는 너의 이름을 잊지 않고 있었어. 단언컨대 지금의 너는 나란 존재 자체도 기억하지 못하겠지. 반면, 나는 너의 이름은 기억하나 지금의 네 얼굴까지 찾아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



우리는 누군가를 처음 기억할 때 이름을 머릿속에 입력하지. 그리고 가장 먼저 기억에서 삭제되는 것도 이름인 것 같아. 얼굴은 어렴풋하게 생각나는데 이름을 기억하지 못해 당황했던 기억들이 여러 번 있었지. 존재를 의미 있게 기억하기 위한 첫 번째 행위가 상대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 그리고 불러주는 것. 발화하는 순간, 꽃이 핀다고 생각해. 이름은 현재 진행형이 아닌 완성형이니깐. 씨를 뿌리는 순간, 마법처럼 꽃이 피고, 우리의 관계는 달라지기 시작해. 우리의 이름은 과정이 아닌 결과론에 입각한 완성품. 우리에게 부여된 암호이자 기호. 각자 서로에게 입력된 모스부호 같은 것이지. 부호를 외워야만 의미를 파악할 수 있으니깐.



나의 이름이 너의 기억 속에 새겨지고, 너의 이름이 나에게 특별하게 입력될 때 관계의 물꼬가 트게 돼. 서로에게 이름을 불러주는 순간, 좀 더 긴밀하게 다가오지. 함께 추억할 꺼리들이 생기고, 한 시절을 공유하게 돼. 내가 기억하는 이름들이 곧 나의 지난 시간이자 세월이었음을. 그 시절을 추억하기 위해 우리가 소환하던 이름들은 단편적이지만 소중하지. 이제는 타인이 된 이름으로 나는 기억해. 그 시절의 공기와 무게감과 출렁대던 감성들이 다 내게로 온다는 걸. 그것이 시절 여행이 되고,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연결해 주는 어떤 길이 되지.



그 길 위에 서면, 나는 나의 길을 생각해. 지나온 길들과 지금 서있는 길, 그리고 내가 앞으로 가야 할 길들에 대해. 그 길 위에서는 나는 어떤 이름을 불러야 할까. 그 이름의 주인공을 따라 나는 함께 걸을 수도 있겠지. 같이 걸어갈 존재를 만드는 것. 소중한 존재를 품고 싶다면,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할 노력은 바로 상대방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



언제든 부르면, 만날 수 있는 존재가 많을수록 나의 삶의 온도가 다르겠지. 하지만, 나는 내가 기억하는 이름의 개수는 중요치 않아. 오래도록 곁에 두고 부르고 싶은 이름, 그 이름을 가진 존재들이 소수여도 좋아. 나를 따뜻하게 불러준다면, 나의 이름을 기억해 준다면, 어떻게든 그때가 가장 좋은 시절이야. 너의 이름을 기억할게. 우리 함께 시절을 걷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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