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에서 가지고 나온 것은 고작 1박스...30여년 직장생활 개인 유물
요즘 60살은 뒷방 노인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어려서 보았던 보통의 할아버지 이미지보다는 젊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힘도 있고, 열정도 있습니다. 다만 연말이 지나면 회사의 공기가 달라진다는 것을, 그 나이에 더 또렷하게 느끼게 됩니다.
연말이 지나면 대기업에서 재선임이 안 된 임원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쏟아진다는 말이 과장일 수 있지만, 실제로 많은 분들이 강제 퇴직을 당합니다. 임원들은 전날 저녁에 통보를 받습니다. ‘재선임과 퇴사 여부’를. 많은 사람들은 잔인하다고 말합니다. ‘재선임 될 것’ 아니면 ‘되겠지’라고 생각했던 분들은 머릿속이 텅 빕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은 예정대로 출근해야 합니다. 전날 밤 통보를 받고도, 다음 날 아침은 그대로 진행된다는 점이 더 낯섭니다. 그리고 서둘러 드라마에서처럼 개인 물품을 정리해서 박스에 담아 집으로 가져갑니다. 박스는 생각보다 가벼운데, 걸음이 무거운 날입니다. 이것이 퇴직하게 된 날의 작은 풍경입니다.
이렇게 퇴사를 하게 되면 멍하니 몇 개월을 보냅니다. 그 기간 동안 재취업의 자신감을 가지고 많은 사람을 만납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벌써 1970년대생들이 회사의 경영진으로 전진 배치되어 있어 나와 같은 60년대생은 물러나는 것이 당연시 되어지고 있습니다.
이는 대기업은 물론 중견기업, 소기업까지 마찬가지입니다. 예전에 우리 윗선배들은 은퇴하면 한 직급 올려서 작은 회사로도 이직을 했었는데, 지금은 웬만해서 낙타가 바늘구멍 빠져나가는 것과 같이 힘들어졌습니다. 이 현실을 ‘안다’와 ‘겪는다’ 사이의 거리는 생각보다 길고, 그 거리를 걷는 데 보통 몇 달이 걸립니다.
이러한 현실을 깨달으면 6개월이 지납니다. 어떤 분은 개인택시를 구입하기도 하고, 어떤 분은 편의점을 차리고, 어떤 분은 외식 프랜차이즈 가맹점을 차립니다. 이 또한 1년을 버티시는 분이 드뭅니다. 60이 넘어서 반드시 들어가야 될 비용, 병원비, 생활비, 건강보험료 등을 생각하면 일을 안 할 수 없습니다. 비용은 한 번도 멈춰본 적이 없는데, 수입만 멈추는 구조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이가 50이 넘으면 이제 퇴직 준비를 해야 합니다. 퇴직을 하면 없어지는 것들을 적어보라고들 합니다. 가장 먼저 급여가 떠오릅니다. 맞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묵직하게 다가오는 것이 있습니다. 재직 당시 몰랐던 가치, 회사라는 뒷배경과 권한을 가지고 있던 직급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재직 시 잘 만났던 사람들의 만남도 어려워집니다.
‘오늘은 바빠서, 죄송합니다. 다음에 전화드리겠습니다’로 끝나는 거절의 멘트들입니다. 관계가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온도가 달라지는 느낌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나를 회사와 권한 때문에 만난 것이지, 오로지 나를 보려고 만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돌아보면 나 역시 그 구조 안에서 편하게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때는 나도 몰랐고, 상대도 굳이 말하지 않았습니다.
퇴직을 앞두고 제일 먼저 준비할 것은 나를 소개할 무엇을 만들어야 합니다. 재직 시 사람을 만나면 무심코 전달했던 명함의 무게를 퇴직하게 되면 알게 됩니다. 명함은 단순한 종이가 아니라, 내가 어느 조직에 속해 있고 어떤 권한을 갖고 있는지를 대신 설명해주던 장치였습니다. 그것이 나를 만나는 사람이 나의 가치를 인정해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그 종이 한 장이 사라지는 순간부터는 ‘회사’가 아니라 ‘나’로 서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Peter F. Drucker)가 던진 질문이 떠오릅니다. “우리는 결국 무엇으로 기억될 것인가를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회사에 있을 때는 조직이 그 질문을 대신해줍니다. 퇴직 이후에는 그 질문이 온전히 개인에게 돌아옵니다. 이 질문 앞에서 답을 준비하지 못하면 막막함이 길어집니다.
그러려면, 자신이 잘해왔던 것, 잘하는 것, 개발해야 할 것 등을 고민해야 합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중에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아야 합니다. 저는 2016년 11월 호기롭게 포스코건설을 퇴직했습니다. 당연히 다른 기업에서 나를 찾겠지, 아니면 내가 갈 곳이 있겠지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나를 과신했습니다. 회사의 시간을 내 실력으로 착각한 부분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스스로에게 비판적이 됩니다.
무엇을 할까를 정했으면, 이제 업무에 대해 스스로 정리를 하고 기록으로 남겨야 됩니다. 수첩도 좋고, 온라인에 저장해도 좋습니다. 그리고 생각나는 아이디어도 적습니다. 그리고 잘된 성공 사례들과 실패 사례들도 분석해서 정리해 놓습니다. 준비는 거창한 계획이 아니라, 내가 나를 설명할 문장 몇 줄을 미리 갖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만약 해왔던 일과 아주 다른 일이라고 하면, 사외 교육기관에서 강의를 듣습니다. 영어도 꼭 배우길 권한다고들 합니다. ‘내가 대입 때 만점 맞은 사람이야’라고 자만하면 안 된다는 말도 결국 같은 뜻입니다. 나도 나와 보니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는 바보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50대 초반이라면, 대학원 진학을 고민합니다. 물론 자녀 사교육비 등 만만치 않게 생활비가 들어가지만, 미래를 위한 투자로 생각하고 대학원을 고민해 보게 됩니다. 석사의 자격이면 자신이 그동안 정리한 것을 바탕으로 강의할 기회도, 책을 쓸 기회도 생깁니다. 여력이 있다면 취미를 업으로 삼는 분도 있습니다. 박용만 전 회장님처럼. 그러나 직장생활 한 분들은 그 정도의 재산을 모으기 힘듭니다.
이 지점에서 워런 버핏(Warren Buffett)의 말도 떠오릅니다. “자신에게 투자하는 것이 가장 높은 수익을 남긴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자산보다 시간과 경험에 더 잘 어울리는 말처럼 느껴집니다. 퇴직 이후에는 결국 ‘얼마를 벌 수 있는가’만 남는 게 아니라, ‘내가 무엇으로 다시 서는가’가 앞에 놓이기 때문입니다.
쉽게 얘기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유튜브를 해라, 언론사를 차려라 등등입니다. 정작 편의점 알바라도 하라고 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실례라고 생각해서인지 몰라도, 그 말이 현실에 더 가까울 때가 있습니다. 퇴직 이후의 시간은 ‘체면’과 ‘생활’ 사이에서 자주 흔들립니다.
가장 깨달은 것은, 환경의 변화, 교육 등 퇴직 준비 책들이 많이 나와 있다는 점입니다. 모두가 비슷한 얘기입니다. 나는 가장 중요한 것이 퇴직하자마자 나를 어떤 사람이고 바로 증명할 수 있어야 된다고 느꼈습니다. 회사라는 이름이 빠진 자리에서 결국 남는 것은 ‘나’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준비를 철저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 위해 내가 화제를 던지고 함께 고민할 수 있도록, 그리고 조기 퇴직한 선배로서 퇴직을 앞둔 분들에게 준비해야 할 것들을 정리해서 글로 남기려 합니다. 이 글은 누군가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때의 풍경과 그 이후의 시간을 가능한 그대로 남긴 기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