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음악]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유감

Bach/Siloti- Prelude in B minor BWV 855a

by 메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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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극장가에서 뜨겁다. 단종과, 그의 시신을 묻고 모든 가족과 함께 숨어 살았던 남자 ‘엄홍도’의 이야기를 바탕에 둔 영화다.


지난해 영월 남면 광천리에 있는 청령포를 다녀온 적이 있다. 청령포로 가는 배가 선착장에서 정기적으로 관광객을 태우며 오간다. 안으로 들어가면 기품이 있어 보이는, 소박한 한옥이 있고, 그 주위로 소나무들이 줄줄이 서 있다. 그 길이 산책하기에 좋아 천천히 걸었던 기억이 남아 있다. 단종도 이 길을 여러 번 거닐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든다.


이곳에는 관음송(觀音松) 한 그루가 있다. 수령이 630년이 된 천연기념물 소나무다.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단종이 둘로 갈라진 나무줄기에 걸터앉아 시간을 보냈다고 전한다. 단종의 비참한 모습과 울음소리를 지켜보고 들었다 하여 ‘관음(觀音)’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도 한다. 나라에 큰 재난이 생길 때면 나무의 색이 붉은빛에서 검은빛으로 변했다고 전해지는 이야기까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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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령포 한옥 뒤편으로는 조그만한 산을 오르는 길이 있다. 그 길 중간쯤 가다 보면 ‘망향탑’이라는 돌을 쌓은 탑이 서쪽을 향해 서 있다. 홀로 유배 온 단종이 한양에 남겨진 정순왕후를 그리며 쌓은 탑이라고 한다. 반대로 서울 숭인동에는 동망산(東望山)이 있고, 꼭대기 봉우리를 동망봉이라 한다. 단종비 송씨, 정순왕후가 초가암자 정업원(淨業院)을 짓고 동쪽 영월을 바라보며 단종을 그리워한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한 사람은 영월에서 한양을 생각하고, 다른 한 사람은 서울에서 영월을 바라본다. 그 거리만큼의 시간이 역사에 남아 있는 듯하다.


영화 속에서는 나오지 않았던 정순왕후 이야기, 그리고 단종의 시신을 자신 어머니를 모시려고 미리 준비한 관에 모시고 현재 단종 묘 자리에 모셨던 일화, 그리고 엄씨가 도망다니며 살았던 인생 등이 더 그려지지 않아 아쉬웠다.


솔직히 나는 단종의 이야기를 역사를 통해 많이 알고 있다. 그래서 영화가 ‘엄씨(엄홍도)’가 단종을 만나면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 이후의 일생이 더 궁금해 극장을 찾았는데, 그 내용이 비어 있는 느낌이라 더 아쉬웠다. 그럼에도 영화는 상상 속에서 주민과 연대, 식구라는 의미, 호랑이의 의미 등을 읽게 해 주었고, 그 지점은 분명히 남는다.


영화가 끝나고 나오는 관객들의 얼굴에서 미소를 찾기는 어렵다. 상영 중간중간 유해진 배우의 익살스러운 연기에 웃기도, 단종과 마을 주민 사이의 연대를 보며 잠깐 미소를 짓기도 했을 것이다. 유지태의 한명회 연기를 보며 잔인함과 칼같은 총명함에 부르르 떨었을지도 모른다. 오랜만에 좋은 스토리를 가진 한국 영화를 볼 수 있어 반갑기도 했다.


Bach: Prelude in B minor, BWV 855a (Arr. by Alexander Siloti)

오늘 고른 곡은 많은 분들이 ‘바흐 원곡’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실로티가 편곡한 곡’입니다.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의 BWV 855를, 알렉산더 실로티(Alexander Siloti)가 피아노용으로 다시 옮긴 버전 BWV 855a입니다. 이 곡의 출발점은 바흐의 E단조 전주곡(훗날 BWV 855로 정리되는 계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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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 Johann Sebastian Bach, 우 : Alexander Siloti)

바흐는 1720년경 장남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Wilhelm Friedemann Bach)를 위한 클라비어뷔흘라인(Klavierbüchlein)에 이 전주곡을 먼저 만들었죠. 1722년에 『평균율 클라비어(Die wohltemperierte Klavier / The Well-Tempered Clavier)』 1권 10번 E단조 전주곡과 푸가(BWV 855)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BWV 855a는 그 ‘초기형 전주곡’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쓰이거나, 자료에 따라 같은 조의 ‘푸게타(fughetta, 작은 푸가)’까지 함께 묶어 부르는 말로도 쓰입니다. 이 푸게타는 1750년 이후~19세기 초 사이 필사본에서 전해졌고, 한때 F. 콘비츠니(F. Konwitschny) 소장본이었으나 원본은 분실되었고, 필름 사본을 바탕으로 신바흐전집(Neue Bach-Ausgabe)에 수록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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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티가 편곡한 것은 크게 두가지 입니다. 첫째, 조성을 E단조에서 B단조로 옮겼습니다. 그래서 같은 음형이 흘러가도 색이 더 어둡고 깊게 들리도록 했습니다. 둘째, 바흐가 원래 왼손에 맡겼던 ‘끊기지 않고 흐르는 16분음표의 움직임’을 오른손 쪽으로 옮겼습니다. 소리의 표면이 더 매끈하게 이어지도록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왼손은 ‘멜로디의 줄기’나 ‘화성의 뼈대’를 더 또렷하게 들려줄 여지가 생기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여기에 실로티는 곡 전체 반복을 넣습니다. 이 반복은 “그냥 한 번 더”가 아니라, 두 번째에는 왼손의 선율이 더 드러나게 편곡했습니다. 그리고 악보에는 왼손 화음이 아르페지오(화음을 한 번에 누르지 않고 굴려 치는 방식)로 표시되어 있는데, 실로티의 딸 키리에나 실로티(Kyriena Siloti)의 말로는 실로티가 첫 번째에는 아르페지오를 빼고, 반복에서 다시 살려 왼손 선율의 효과를 키웠다고 전하기도 했습니다.


또, 이 편곡은 모스크바(Moscow)의 A. 구테일(A. Gutheil)에서 처음 출판되었고, 실로티가 1912년 2월 영국 신문 맨체스터 가디언(Manchester Guardian) 광고 문구에서 “처음으로” 공개 연주한다고 했습니다.

https://youtu.be/ewndA-tF_Ao?si=Q55qRymoGeZL1MHW

이 음악을 피아노 음이 또렷이 들립니다. 그래서 피아니스트들이 무척 신중하게 연주하는 곡이기도 합니다.처음부터 끝까지, 작은 음들이 끊기지 않고 계속 이어집니다. 전주곡이라는 장르는 원래 ‘짧게 문을 여는 음악’처럼 쓰이기도 했지만, 바흐는 그 문을 한번에 열고 들어간다기보다, 일정한 속도로 밀고 들어갑니다.


실로티 편곡에서는 그 흐름이 오른손으로 넘어가면서, 음의 결이 더 잘 보이기도 합니다. 오른손이 계속 이어가는 작은 음들 위에서, 왼손이 중간중간 ‘기둥’처럼 음을 냅니다. 왼손이 화성을 두껍게 쌓아 올리기보다, 필요한 지점에서만 무게를 얹어주기 때문에, 곡이 복잡하게 들리지도 않습니다. 이런 이유로 이 편곡은 많은 피아니스트들이 자주 연주했고, 특히 에밀 길렐스(Emil Gilels)의 연주가 대표적으로 거론되곤 합니다.


부산일보에 실린 [이성훈의 소아시아 기행] 컬럼에서는 바흐가 ‘바다를 묘사하려고’ 쓴 음악은 아니겠지만, 실로티의 편곡과 프랑스 피아니스트 알렉상드르 타로(Alexandre Tharaud) 같은 연주자의 감각을 통해, 듣는 사람이 ‘지중해의 윤슬’을 떠올리는 일이 자연스럽게 벌어진다고 적었습니다. 그는 또 이건 바흐의 의도라기보다, 편곡과 연주가 만들어내는 감각의 이동에 가깝다고 평가했습니다.


단종의 시간과 청령포의 풍경이 떠오르는 아침

오늘 아침 서울은 맑지만 여전히 춥습니다. 기온이 낮고 공기가 마른 날이라 언론에서는 산불을 조심하라는 기사도 자주 보입니다.


어제 본 영화가 단종의 시간과 청령포의 풍경을 떠올리게 했다면, 오늘 아침 바흐의 짧은 전주곡은 그 정서를 조용히 이어주는 느낌입니다. 바흐의 곡을 실로티가 B단조로 옮겨 다시 들려준 이 버전이, 떨어진 시간을 한 번 더 생각하게 합니다.


월요일입니다. 바람이 차고 공기가 건조하니 무리하지 말고, 몸을 따뜻하게 챙기며 편안한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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