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zart: Piano Sonata No. 12 in F Major
한 해의 첫 보름달이 차오르는 정월 대보름이다. 예부터 우리 조상들은 이날을 설날만큼이나 비중 있게 여겼다. 오곡밥과 묵은 나물로 겨우내 부족했던 기운을 돋우고, 부럼을 깨며 한 해의 무사태평을 기원하던 마음은 오늘날까지도 우리 혈관 속에 면면히 흐른다. 달집 태우기와 쥐불놀이로 액운을 날려 보내고 풍요를 청하던 풍습은 단순한 놀이를 넘어, 자연의 순리에 순응하며 살고자 했던 인간의 경건한 기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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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올해 대보름은 예사롭지 않다. 한국천문연구원의 발표에 따르면, 오늘 저녁달이 지구의 그림자에 완전히 가려지는 개기월식이 일어난다. 정월 대보름에 개기월식이 겹치는 것은 1990년 이후 무려 36년 만의 일이다. 달이 검붉게 변하는 이른바 ‘블러드문(Blood Moon)’ 현상은 오후 6시 49분 부분식을 시작으로, 오후 8시 4분에 절정에 달하는 개기식이 시작되어 밤 9시 3분까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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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마주한 하늘은 어제의 비가 그친 뒤 낮은 구름이 가득 내려앉아 있다. 하지만 기상청 예보대로 오후부터 구름이 걷힌다면, 우리는 36년 만에 찾아온 우주의 세리머니를 온전히 목도할 수 있을 것이다. 흐린 아침의 정적 속에서 밤의 붉은 달을 기다리는 시간, 그 기다림의 틈새를 모차르트의 명징한 선율로 채워본다.
(연주 : 조성진 피아니스트)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12번은 그의 수많은 소나타 중에서도 유독 '음악적 풍요로움'이 넘치는 작품입니다. 오늘 정월 대보름의 넉넉한 기운과 참 잘 어울리는 곡이지요.
이 곡은 1783년경, 모차르트가 고향 잘츠부르크를 떠나 빈(Wien)에 정착하여 자유 예술가로서 입지를 다지던 시기에 쓰였습니다. 당시 그는 엄격했던 아버지 레오폴트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의 음악적 색깔을 마음껏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이 시기는 그가 사랑하는 아내 콘스탄체와 결혼하여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찾았던 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K. 332에는 모차르트 특유의 천진난만한 기쁨과 세련된 슬픔이 절묘하게 녹아 있습니다.
이 곡의 재미있는 일화는 '악보의 차이'에 있습니다. 모차르트가 직접 쓴 자필 악보와 사후에 출판된 초판본의 내용이 꽤 다릅니다. 출판본에는 자필보에 없는 화려한 꾸밈음과 정교한 함축적 표현들이 대거 추가되었는데, 학자들은 이를 두고 "모차르트가 직접 제자들을 가르치거나 본인이 연주할 때 즉흥적으로 넣었던 화려한 기교들을 출판 당시에 반영한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즉, 이 곡은 모차르트가 생전에 얼마나 화려한 '피아노의 달인'이었는지를 증명하는 증거물과 같습니다.
https://youtu.be/UYUO8W7wVv8?si=M3xYnFnZqkow3ePr
곡의 전개: 선율의 파노라마 - 1악장 Allegro는 한 편의 오페라를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다채로운 주제의 향연: 보통 소나타는 두 개의 대조적인 주제로 이루어지지만, 이 곡은 끊임없이 새로운 멜로디가 샘솟듯 터져 나옵니다. 마치 정월 대보름날 차려진 풍성한 오곡밥과 나물들처럼 말이죠.
리듬의 유희: 처음에는 우아하고 노래하는 듯한(Cantabile) 선율로 시작하다가, 갑자기 폭풍이 몰아치듯 격정적인 단조 리듬으로 변주됩니다.
상상의 산책: 곡을 듣다 보면 햇살이 내리쬐는 탁 트인 들판을 걷다가, 갑자기 구름이 드리워진 숲 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밝은 빛을 마주하는 기분이 듭니다. 오늘 아침의 구름 낀 하늘과 밤의 개기월식을 기다리는 우리의 마음 상태와도 닮아 있습니다.
조성진 연주의 특징: 절제된 완벽주의
조성진의 모차르트는 '무결점의 투명함'이 특징입니다. 그는 모차르트를 연주할 때 결코 과한 페달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마치 맑은 우물물을 떠내는 것처럼 소리 하나하나가 명징하게 살아 있습니다. 특히 1악장에서 보여주는 그의 터치는 매우 정교합니다. 빠르고 화려한 구절에서도 음들이 뭉치지 않고 진주알처럼 굴러가며, 모차르트 음악 특유의 '우아한 미소 뒤에 숨은 고독'을 아주 담백하게 표현해 냅니다.
오늘 소개해 드린 1악장 Allegro의 생동감 넘치는 시작에 이어, 차후에는 깊은 명상에 잠기게 하는 2악장 Adagio, 그리고 숨 가쁘게 휘몰아치는 화려한 피날레인 3악장 Allegro assai도 차례로 소개해 드릴 예정입니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달을 품고 산다.
때로는 구름에 가리고,
때로는 그림자에 숨지만
달은 결코 빛을 잃지 않는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어제 내린 비는 대지의 묵은 먼지를 씻어냈고, 오늘 아침의 구름은 밤의 화려한 개기월식을 위해 잠시 드리워진 커튼일지도 모릅니다. 모차르트의 소나타 K.332가 주는 경쾌함은 단순히 즐거운 상태가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잃지 않는 '내면의 낙관'을 닮았습니다.
비록 지금 창밖은 흐릿할지라도, 오후의 맑은 하늘과 저녁의 붉은 보름달을 기다리는 마음은 이미 봄의 문턱에 닿아 있습니다. 개기월식으로 달이 잠시 어둠 속에 몸을 숨겼다가 다시 제 빛을 찾는 과정은, 우리 삶의 시련과 회복의 과정과도 같습니다.
오늘 하루, 오곡밥의 든든함처럼 속이 꽉 찬 시간을 보내시길 바랍니다. 밤늦게 구름이 걷히고 36년 만의 귀한 달빛이 여러분의 창가에 머물 때, 오늘 아침 들었던 모차르트의 선율이 다시금 마음속에 기분 좋게 울려 퍼지기를 소망합니다.
풍요롭고 경이로운 대보름 맞이하세요.(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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