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추워진 아침, 성큼 곁에 온 봄 느낌

[아침음악] Schubert: Der Hirt auf dem Felsen

by 메이슨

어제 저녁에는 약수역으로 향했습니다. 7번 출구 근처, 담백한 국물로 소문난 순대국집 ‘해남순대국’에 들러 따뜻하게 배를 채웠습니다. 든든해진 몸으로 하늘에서 펼쳐질 장면을 보기 위해 골목 언덕 위로 올라갔습니다.


밤 8시경부터 시작된 개기월식(Lunar Eclipse)을 지켜보았습니다. 정월 대보름이었지만 달이 유난히 커 보이진 않았습니다. 대신 서서히 어둠에 잠기며 붉은 빛으로 변해가는 그 과정이 또렷했습니다. 휴대폰을 꺼내 달을 찍고 있으니, 뒤편에서 차를 세우던 주민 한 분도 어느새 옆에 서서 같은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말은 없었지만, 같은 하늘을 올려다보는 시간이었습니다. 1시간 남짓 이어진 도심 속 블러드문(Blood Moon)의 밤이었습니다.


도심의 불빛이 있어 덜했지만, 만약 이곳이 한적한 시골이었다면 분위기는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달이 붉게 변하는 장면은 고대 사회에서 종종 불길한 징조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중국과 메소아메리카 기록에도 월식은 하늘의 경고로 남아 있습니다. 어제의 장면도 불빛 없는 어둠 속이었다면, 납량특집 같은 상상이 스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 월식이 이 지역에서 보름달과 겹친 사례가 오랜만이라는 설명도 들었습니다. 기온까지 떨어진 밤이어서인지, 붉은 달의 색은 평소보다 더 선명하게 느껴졌습니다. 주변 식당과 상점의 불빛이 있어 현실에 발을 붙이고 서 있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 월식은 역사 속에서 실제로 한 사람의 생존과 연결된 적도 있습니다. 1504년 2월 29일, 네 번째 항해(1502~1504) 중 자메이카(Jamaica)에 고립되어 있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는 개기월식을 이용합니다.


당시 유럽에서 사용되던 레기오몬타누스의 천문표를 통해 월식 시점을 알고 있었던 그는, 식량 제공을 중단한 원주민들에게 달이 붉게 변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기록에 따르면, 실제로 월식이 시작되자 원주민들은 크게 동요했고, 이후 다시 식량을 제공하게 되었습니다. 이 장면은 그의 아들 페르디난드 콜럼버스의 기록에도 남아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 현상을 과학으로 설명합니다. NASA에 따르면 개기월식 동안 달이 붉게 보이는 이유는 지구 대기를 통과한 햇빛이 굴절되며 짧은 파장의 푸른빛은 산란되고 긴 파장의 붉은빛이 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누군가에게는 신의 심판과도 같은 공포였을 현상이, 과학을 아는 이에게는 절망 속에서 생명을 구한 눈부신 열쇠가 되었던 셈입니다. 어젯밤의 붉은 달은 공포가 아니라, 하늘의 질서를 보여준 순간이 아니었을까요?


오늘 아침 공기는 제법 차갑습니다. 가볍게 입고 나온 산책 복장이 후회될 정도입니다. 하늘은 맑고 투명합니다. 어젯밤의 붉은 빛이 사라진 자리 위로, 봄이 가까이 와 있다는 기척만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프란츠 슈베르트(Franz Schubert)의 <바위 위의 목동(Der Hirt auf dem Felsen)>, D.965를 떠올립니다. 생의 마지막 해에 완성한 이 곡은,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어딘가 밝은 방향을 향해 있습니다.


Franz Schubert: <Der Hirt auf dem Felsen>, D. 965

이 곡은 슈베르트가 세상을 떠나기 불과 한 달 전인 1828년 10월에 완성되었습니다. 육신은 병마로 쇠약해져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던 때였죠. 하지만 슈베르트는 절망에 함몰되는 대신, 인생의 모든 감정(고독, 슬픔, 희망)을 이 한 곡에 응축해 놓았습니다.


당시 유명 소프라노 안나 밀더-하우프트만의 요청으로 쓰인 이 곡은, 그녀의 화려한 기교를 뽐낼 수 있는 '가곡 그 이상의 예술'로 탄생했습니다. 슈베르트는 이 곡의 초연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지만, 그가 남긴 이 '백조의 노래'는 매년 봄이 올 때마다 우리 곁에서 다시 살아납니다.


오늘은 2016년 2월 28일 독일 쾰른(Cologne) 산크타 클라라 켈러(Sancta Clara Keller)에서 열린 실황 무대에서, 소프라노 안나 루치아 리히터(Anna Lucia Richter), 클라리넷 블라주 슈파로베츠(Blaž Šparovec), 피아노 니콜라스 림머(Nicholas Rimmer)가 함께한 Ensemble der KammerMusikKöln의 연주로 감상합니다.

https://youtu.be/XmPeoEvSXWc?si=omMvRE2ZiEyoJhE3

이 곡은 소프라노와 피아노, 그리고 목동의 피리를 상징하는 클라리넷이 함께 어우러집니다. 전체적인 흐름은 오늘 아침의 날씨와 우리의 마음을 그대로 투영합니다.


[장면 1] 바위 위의 고독 (Andantino): "깊은 골짜기 위 높은 바위에 서서 노래하네." 클라리넷의 청아한 도입부는 산울림과 메아리를 형상화합니다. 목동이 높은 곳에서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부름이죠. 마치 우리가 구름 낀 아침에 홀로 서서 비를 기다리는 정적과 같습니다.


[장면 2] 짙은 구름 같은 슬픔 (Andantino - 단조): "내 사랑은 멀리 있고, 기쁨은 사라졌구나. 나는 너무나 외롭네." 음악이 단조로 변하며 내면의 슬픔이 쏟아집니다. 오늘 아침을 덮은 낮은 구름처럼, 삶의 무게와 그리움이 짙게 배어 나옵니다. 슈베르트 자신의 고독이 가장 투명하게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장면 3] 봄을 향한 세레모니 (Allegretto): "봄이 오고 있네, 나의 기쁨인 봄이! 이제 나는 길 떠날 준비를 하네." 음악은 갑자기 화사한 왈츠 리듬으로 변신합니다. 비가 그친 뒤 햇살이 터져 나오듯, 목동은 이제 바위를 내려와 봄의 한복판으로 여행을 떠납니다. 36년 만의 붉은 달이 지나가고 맞이하는 새 아침의 희망처럼, 곡은 찬란한 환희 속에 마무리됩니다.

슈베르트 <바위 위의 목동> 가사 : 봄이 오는 초원에서 목동이 느끼는 고독-애수-희망으로 이어지는 내용


1부: 세상과 소통하고 싶은 목동의 외침 (고독)

목동은 깊은 골짜기가 내려다보이는 높은 바위 위에 홀로 서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노래가 저 아래 세상까지 닿기를 바라며 목소리를 높입니다. 이때 들려오는 '메아리'는 그의 유일한 대화 상대입니다.

핵심 정서: "내 노래가 멀리 퍼질수록, 저 밑바닥에서 메아리가 신비롭게 되돌아오네."


2부: 깊어지는 그리움과 마음의 그늘 (애수)

갑자기 음악이 단조로 바뀌며 목동의 내면으로 침잠합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연인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아무도 없는 산속에서 느끼는 사무치는 외로움이 그를 덮칩니다. 오늘 아침의 낮은 구름처럼 무겁고 짙은 슬픔이 가사 전반을 지배합니다.

핵심 정서: "내 기쁨은 사라졌고 희망도 끝났구나. 나는 이 산 위에서 너무나 고독하고 외롭네."


3부: 다시 피어나는 생명과 여행의 시작 (희망)

절망의 끝에서 목동은 다시 고개를 듭니다. 겨울이 지나면 반드시 봄이 온다는 자연의 섭리를 깨달은 것이죠. 이제 그는 바위 위에 머물지 않고, 다가올 봄을 맞이하기 위해 길을 떠날 준비를 합니다. 목소리는 다시 생기를 되찾고 화려하게 비상하며 끝을 맺습니다.

핵심 정서: "봄이 오고 있네, 나의 기쁨인 봄이! 이제 나는 길을 떠나네. 나의 노래가 온 골짜기에 찬란하게 울려 퍼지네."


이 곡의 가사는 결국 "슬픔이라는 비가 내린 뒤, 기어코 봄이라는 문을 열고 나가는 우리네 삶"을 압축해 놓은 것과 같습니다. 슈베르트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가사의 끝을 '길 떠남(여행)'과 '봄'으로 마무리하며 우리에게 희망을 건네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이 곡을 들으실 때, 클라리넷과 소프라노가 서로 가사를 주고받는 느낌에 집중해 보세요.

처음에는 클라리넷이 목동의 '피리'가 되어 길을 안내하고,

중간에는 목동의 '한숨'이 되어 함께 울어주다가,

마지막에는 봄바람에 흔들리는 '꽃잎'처럼 소프라노의 목소리 주변을 가볍게 맴돕니다.

가사를 알고 들으면, "슬픔을 딛고 기어이 봄을 찾아내려는 한 인간의 숭고한 발걸음"이 느껴집니다. 오늘 아침의 비가 그친 뒤 우리가 맞이할 그 '찬란한 봄'처럼 말이죠.


마음으로 먼저 마중 나가는 봄의 길목

어젯밤의 기이한 여운과 오늘 아침의 서늘한 공기가 교차하는 시간입니다. 비록 가벼운 산책길이 움츠러들 만큼 쌀쌀한 날씨지만, 슈베르트(Schubert)의 <바위 위의 목동> 속 클라리넷(Clarinet) 선율은 그 서늘함을 뚫고 이미 봄의 문턱에 닿아 있습니다.


과학과 지혜가 교차하던 어제의 밤은 지나갔고, 이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정월 대보름의 보름달처럼 꽉 찬 봄의 햇살일 것입니다. 이번 주의 추위는 봄이라는 귀한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대기를 깨끗이 정화하는 마지막 과정일 테니까요.


이해인 수녀님의 시집 '민들레 영토'에서 '겨울이 깊어질수록 봄이 더 가까이 와 있다'고 노래했듯이, 차가운 시간이 길어질수록, 반드시 따뜻한 봄의 시간이 온다는 믿음이 계절보다 우리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슈베르트의 <바위 위의 목동>도 그렇습니다. 고독과 그리움이 먼저 흐르지만, 음악은 끝내 밝은 음형으로 나아가며 희망을 품습니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봄의 느낌이 오듯이, 고독과 애수 넘어에 어딘가 희망을 노래하듯이 말이죠.


누군가 "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마음이 이미 꽃이다. 봄은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마음으로 먼저 마중 나가는 것이다"라고 말했듯이, 우리는 따뜻한 봄을 맞이하기 위해 미리 문턱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미 우리 마음속에 피어난 꽃을 품고, 곧 당도할 봄의 길목에서.(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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