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念] 공부에 대한 생각

어제 고교동창과 만남, 대화에서 느낀 어색함과 불편함

by 메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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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점심에는 경찰을 그만두고 법무법인에서 일하는 고교 동창을 만났다. 동창은 경찰 출신이어서 그런지 말이 거침이 있다. 인물에 대한 평가도 그렇다.


역사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나는 이덕일 선생의 역사관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현장을 찾아가 흔적을 확인하고, 한민족사의 공간을 더 넓게 보려는 시도 자체가 좋고, 그래서 그의 글을 읽는 편이라고 덧붙였다. 동창은 “같은 충청도 출신이라고 비난받는다”는 말부터 꺼냈다. 공부가 출생지하고 무슨 상관인지. 나는 식민사관이 지금도 논쟁이 되는지를 물었다. 동창은 그건 특정 진영이 하는 이야기라고 한다. 동창은 독서 등 공부하지 않는구나라고 느꼈다.


그 외에도 박정희 대통령부터 엊그제 돌아가신 이해찬 전 총리까지 이야기가 이어졌다. 동창의 대답과 나의 생각이 다름을 알고 입을 다물게 되었다. 나는 더 말하지 않기로 했다. 말이 길어질수록 서로를 설득하는 대화가 아니라 서로를 재단하는 대화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때 조선일보 곽아람 기자의 에세이 『공부의 위로』에서 읽었던 문장이 떠올랐다. “사람을 사귈 때면 항상 마음속 지층을 가늠해 본다. 이 사람은 어느 층위까지 내게 보여줄 것이며, 나는 내 안의 어떤 층위까지 그를 허용하고 인도할 것인지 궁금해진다.” 나도 보여줄 층위가 낮은데, 그 동창은 어떨까. 어제 만난 동창은 어디까지를 내게 보여주는 사람일까, 나는 어디까지를 들여다볼 수 있을까, 그런 질문이 남는다.


서로가 살아온 인생의 길이 틀리다. 자신의 생각을 중심에 두고 남이 맞다, 틀리다를 평가하는 이들이 있다. 맞다와 틀리다가 아니라 같다와 다르다가 맞을 것이다. 자신과 다르다고 해서 나쁜 사람은 아니다. 나와 다른 생각을 들어보는 것도 나에겐 공부의 한 방법이니까.


공부해야 한다는 마음이 들 때면 나는 법정스님을 떠올리게 된다. 스님이 고독을 ‘자기를 자각하기 위한 것’으로 말했듯이, 나는 공부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공부는 자신의 고독 속에서 수양해나가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 고독은 거기에 머무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로부터 시작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나는 매일 독서를 하고, 강의를 듣는다. 나에게 공부는 결국 ‘나로부터 시작하기 위해’ 붙잡는 습관이 되었다.


함께 고등학교를 공부했고, 민주화 시기에 대학을 다녔다. 그 시절을 걸어왔던 사람들이 각자 다른 방식으로 ‘믿음’을 만들었듯, 지금 내가 붙잡고 있는 공부와 대화의 태도도 결국 그런 시간 위에 놓여 있는 것 같다. 어제의 대화가 불편했던 건, 각 자의 옳고 그름 이전에, 서로가 상대의 생각을 대하는 방식이 달랐기 때문이다.


아침 부리나케 신영복 선생님의 『담론』이라는 책을 책장에서 찾았다. 그리고 책을 읽으며 밑줄 쳐놓은 20페이지쯤의 문장을 다시 한번 읽고, 내가 오늘 책을 읽는 이유와 공부하는 이유를 다시 마음에 새겼다.

“삶이 공부이고 공부가 삶이라고 하는 까닭은 그것이 실천이고 변화이기 때문입니다. 공부는 세계를 변화시키고 자기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이 아침은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앞뒤 안맞는 글로 나를 정당화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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