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울작가의 『나를 돌보지 않는 나에게』
김영사에서 2019년에 출판된 정여울(Jeong Yeo-ul) 작가의 심리학 에세이 『나를 돌보지 않는 나에게』. 이 책의 제목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선뜻 읽을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흔히 서점에서 자주 보게 되는 자기계발서나 자기치유 에세이쯤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돌아보면 그 판단은 너무 성급했습니다.
몇 년이 지난 올해, 서점을 방문해서 가장 먼저 읽어야 될 책들중 하나로 구매했습니다. 사두기는 했지만 곧바로 펼치지는 않았습니다. 책은 한 달 가까이 제 백팩 안에만 들어 있었습니다. 개인적인 일들이 있기도 했지만, 잠시 본 몇개의 글을 보고 엄두가 나지않아 매일 들고 다니기만 했지 읽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 지난달부터 비로소 읽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쉽지 않았습니다. 심리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낯선 데다, 이 책에는 다양한 인용 도서와 심리학 용어, 학자들의 개념들이 적지 않게 등장합니다. 그래서 흔히 말하는 ‘술술 읽히는 책’은 아니었습니다. 한 번 읽고 바로 이해했다고 말하기도 어려웠습니다. 오히려 읽다가 멈추고, 다시 읽고, 밑줄을 긋고, 노트에 적어두고, 덮었다가 다시 펼치는 일이 반복됐습니다. 그렇게 두 번 정독하고 나니, 어렵게 읽었던 시간이 아깝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읽기를 잘했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이 책은 남을 이해하는 법보다 먼저 나 자신의 상태를 돌아보게 했습니다. 개인적인 관계든, 업무적인 관계든, 오래된 인간관계든, 인터넷과 AI 같은 현대의 플랫폼 속에서 새롭게 맺어지는 관계든, 우리는 늘 누군가와 연결된 채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렇게 바깥을 향해 오래 반응하며 살다 보면 정작 내 안이 얼마나 고갈되어 있는지, 내가 얼마나 닳아 있는지, 잘 알아차리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이 책은 바로 그 지점이 나의 관심을 증폭시켰습니다.
읽는 동안 저는 제 상태가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 역시 위로를 받아야 할 대상이고, 칭찬을 받아야 할 대상이라는 사실을 새삼 인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존감이 생각보다 많이 떨어져 있었다는 것도 발견했습니다. 이 책은 그런 나를 억지로 다그치지 않았습니다. 대신 “괜찮다”고 다독이고, 다시 치유의 길로 걸어갈 수 있도록 조용히 방향을 보여주었습니다. 작가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의 사례를 통해서, 그리고 이름 있는 학자들의 문장을 인용하면서 말입니다.
책을 읽는 내내 많은 생각을 이끌어 내고, 여러 책들을 찾아 심리학 용어, 영화리뷰, 책 소개 등을 읽고 탐구했던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자기 치유의 시작은 결국 자신을 사랑하는 데에서 출발한다는 것, 그리고 내 안에 남아 있는 에너지를 발견하고 그것을 자존감을 회복하는 힘으로 바꾸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주 작게나마 이 책을 통해 심리학이라는 세계를 조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조금, 아주 미세하게 말입니다. 물론 여전히 심리학은 어렵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혈액형이나 MBTI처럼 몇 개의 유형으로 나눠 설명할 수 있을 만큼 사람의 내면은 평면적이지 않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너무나 많은 결을 가지고 있고, 상황에 따라 다른 색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읽는 일은 어렵고, 수많은 학자들이 오랫동안 이 분야를 연구해온 것일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자신의 상처를 통과하며 심리학을 공부하고, 그것을 다시 글로 풀어낸 정여울 작가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며 제가 처음 알게 된 개념 가운데 하나는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라는 구분이었습니다. 상상계는 무책임한 순수성을 지닌 공간이고, 상징계는 언어를 통해 현실을 감당하는 어른들의 공간이며, 실재계는 자신도 미처 다 알지 못하는 내재된 에너지를 품고 있는 공간입니다.
작가는 이 실재계가 있기 때문에 인간이 자기 안의 최고의 가능성을 살아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실재계는 도저히 해낼 수 없을 것만 같던 일을 마침내 해내게 하는 힘이며, 운명의 장애물을 뛰어넘게 하는 용기이자 사랑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대목을 읽으며 저는 최근 동계올림픽에서 최고령 국가대표 선수로 주목받았던 김삼겸 선수의 경기를 떠올렸습니다. 한 사람의 꿈은 결코 혼자 완성되지 않습니다. 가족의 지지와 믿음이 있었고, 무엇보다 본인이 자신의 가능성을 끝까지 믿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 설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실재계를 포기하지 않은 사람의 모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노래 경연 프로그램을 좋아합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무명 시절부터 오랫동안 자기 꿈을 붙들고 살아온 사람들의 서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편의점에서, 식당에서, 공사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버텨온 시간이 결국 무대 위의 노래로 이어지는 모습을 볼 때, 그 사람의 실력만이 아니라 그 시간을 사랑해온 용기가 함께 보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이야기는 서사가 되고, 보는 사람에게 감동을 줍니다.
반대로 최근 미디어와 예능 프로그램에서 자주 비춰지는 고액 출연료를 받는 연예인, 높은 수입을 올리는 직장인, 성공한 셰프들의 경쟁은 때로는 나와 전혀 다른 세상의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물론 그들 역시 저마다의 과정이 있었겠지만, 방송은 종종 그 과정보다 결과와 수치, 유명세를 먼저 보여줍니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들의 꿈에도 어느새 ‘돈 많은’, ‘유명한’이라는 형용사가 먼저 붙게 됩니다. 정여울 작가는 이런 흐름을 두고 “매스미디어와 자본의 힘으로 질식시켜 미디어 친화적 인간으로 획일화”한다고 비판합니다. 홍보를 해온 저로서는 공감이 가는 부분입니다.
작가의 글을 읽으며, 자신보다 더 높은 곳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려는 인간의 아름다움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실재계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이라고 느꼈습니다. 또 그 과정을 행복하게 즐긴다는 점에서 나의 마음을 건드립니다. 행복하게 즐긴다는 것은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이를 지지하는 가족, 친구 등도 덩달아 행복해지기 때문입니다.
행복하게 즐기며 더 높은 곳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 먼저 자신과의 솔직한 대화가 필요합니다. 정여울 작가는 자기 안의 빛과 그림자를 함께 사랑하는 것이 진정한 성숙이라고 말하며, 특히 그림자와 대면하라고 권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림자와 만난다는 것은 결국 내 콤플렉스와 트라우마, 나조차 외면하고 싶은 치부를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이것이 성장 또는 변화의 시작입니다.
이를 위해 작가는 자신을 싫어하는 이유를 써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사랑해야 할 이유를 다시 써보라고 말합니다. 이 제안은 단순하지만 결코 쉽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자신의 그림자와 마주하는 훈련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제 치부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일이 두렵고 무섭습니다. 하지만 작가의 말처럼 그것을 뛰어넘어야만 비로소 자신을 진실하게 사랑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신을 대면한다는 것은 소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그림자를 보듬어주며 용서하는 것이 대면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보았습니다. 정여울 작가는 다른 표현으로 '마음에게 안부를 묻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과 대화하는 사람만이 결국 자기 자신의 가장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문장은 읽는 동안 제 안에 오래 머물렀습니다.
상처에 취약한 마음은 상처받지 않기 위해 더 높은 방어벽을 쌓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쌓은 벽이 남에게만 향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향한다는 점입니다. 어느 순간부터는 자신에게조차 거짓말을 하게 되고, 진정한 소통은 어려워집니다. 그렇게 되면 상처에 둔감해지는 대신 자기공감에 이르지 못하게 됩니다.
이 책에서 설명하는 ‘에고’와 ‘셀프’의 구분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에고는 사회적 자아가 원하는 것, 즉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평가를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반면 셀프는 내면의 자기가 원하는 것, 내 안 깊은 무의식이 진정으로 기뻐하는 것을 향합니다. 상처를 입었을 때 지금 내가 아픈 이유가 에고의 차원인지, 셀프의 차원인지 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작가는 말합니다.
이 대목을 읽으며 제 식으로 정리를 해보았습니다. 셀프는 괜찮다고 말하는데, 남의 평가를 더 중시하는 에고는 괜찮지 않다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반대로 겉으로만 “나는 괜찮다”고 말하고, 실제는 '괜찮지않아'라고 답한다면, 오히려 스스로의 상처를 둔감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에고와 셀프는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교류해야 합니다. 에고는 타인의 평가를 두려워하면서도 그것에 휘둘리지 않는 연습을 해야 하고, 셀프는 그럼에도 상처를 이겨내겠다는 내면의 의지를 키워야 합니다. 저는 이것이야말로 자기공감이며, 자신을 성숙하게 사랑하는 길이라고 느꼈습니다.
책에 소개된 정관스님과 제프 고디너(Jeff Gordinier)의 일화도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제가 노트에 적어둔 문장은 이것입니다. “‘나는 반드시 인정받아야 한다’는 에고의 집착을 버린 요리, 단지 맛으로 승부하는 음식이 아니라 타인의 아픈 마음을 치유하는 스님의 요리에는 비싼 재료도 조리료도 들어가지 않지만, 인간과 세상을 향한 무구한 사랑과 자비가 깃들여 있다.” 이 문장을 읽으며 정관스님의 음식 철학 역시 타인의 평가를 중시하는 에고를 넘어, 사랑과 정성, 수행이라는 셀프를 실현한 결과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결국 진정한 맛도, 진정한 성숙도, 자기 자신과의 깊은 화해에서 시작되는 것 아닐까 싶었습니다.
재난이나 사고 같은 큰 사건만이 사람에게 트라우마를 남기는 것은 아닙니다. 진학과 진급의 실패, 반복되는 좌절, 기대했던 결과를 얻지 못한 경험들도 자존감을 무너뜨리고 다시 도전할 마음조차 잃게 만드는 작은 트라우마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런 상처를 평생 붙들고 살아가고, 어떤 사람은 그것을 통과해 다시 삶을 꾸려갑니다. 이 둘의 차이를 정여울 작가는 회복탄력성이라고 설명합니다.
책에서는 심리학자 게오르크 피퍼(Georg Pieper)의 『쏟아진 옷장을 정리하며』를 인용합니다. 옷장 안이 엉망이 되었을 때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결국 모든 옷을 꺼내어 하나하나 접고 정리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상처도 그렇습니다. 상처 하나하나를 꺼내어 바라보고 정리하는 것, 곧 상처와 용감하게 대면하는 것이 치유의 시작이라는 설명입니다.
특히 이 책의 “내 문제에 대한 최고의 해결방안은 오직 나만 생각해낼 수 있다. 치유는 수동적인 처치가 아니라 적극적인 투쟁이다”라는 문장은 강하게 남았습니다.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불굴의 전사처럼 맞서 싸울 용기가 필요하다는 말이, 다소 강하게 들리면서도 이상하게 나에게는 현실적으로 다가오며 나를 질책하는 문장 같았습니다.
책을 읽으며 저는 제가 처한 환경만을 탓했던 시간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물론 환경의 영향이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치유의 대상은 결국 내 자신이었습니다. 그래서 내 상처들과 솔직하게 대면해야 했고, 감추었던 상처마저 보듬는 것부터 시작해야겠다고 다짐해봅니다. 에고의 가치 때문에 다친 내적 상처를 셀프의 힘으로 다시 일으켜 세워야 겠다고 용기를 가져보려 합니다. 그리고 그 셀프를 고취시키기 위해서라도 상처의 정리가 필요했습니다. 그 일은 결국 누가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나인척 하는 가짜 나도 아니고, 진실로 나를 대면한 나만이 할 수 있습니다. 정여울 작가의 말처럼, 내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은 누군가 대신해주는 일이 아니라 내가 직접 통과해야 하는 싸움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내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한 달 반 동안 제 백팩 안에 들어 있었습니다. 들고 다니며 읽고,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하고, 노트에 옮겨 적고, 다시 읽었습니다. 한 번 읽고 책장을 덮으면 또 잊어버리고, 그래서 다시 펼치게 되는 책이었습니다. 읽고 까먹고 다시 읽는 과정을 반복하게 만든 책이었습니다.
책 속에는 많은 책과 영화, 사례들이 인용됩니다. 그것들을 읽다 보면 정여울 작가가 얼마나 폭넓게 읽고 오래 생각해온 사람인지 느끼게 됩니다. 저는 책을 덮으면 금세 까마귀처럼 잊어버리는 제 자신을 돌아보며, 그 지적(知的) 성실함이 참 대단하게 느껴졌습니다. 동시에 글은 또 왜 이렇게 잘 쓰는지, 부럽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책을 덮으며 작가의 머리와 재능을 조금 질투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난 뒤 가장 크게 남은 것은 질투가 아니라 반성이었습니다. 나는 나를 얼마나 오랫동안 돌보지 않았는가. 그리고 이제는 나를 조금 더 깊게 배려해야 하지 않을까. 이 책은 바로 그 질문을 남깁니다.
『나를 돌보지 않는 나에게』는 단순히 상처를 위로하는 책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사회에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이 자기 안의 빛과 그림자, 에고와 셀프, 상처와 회복의 가능성을 차분히 들여다보게 만드는 책이라고 판단됩니다.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지만, 천천히 읽을수록 자기 마음의 결을 더 오래 생각해보게 되는 책입니다.
그래서 내적 상처가 많으신 분들에 읽기를 권합니다. 위로, 위안, 공감, 용기를 얻게될 것입니다.(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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