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 슬픔을 위로한다"

제주 4.3 희생자 유가족을 위한 위로

by 메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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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눈물이 가슴 깊은 곳에 고인 슬픔을 가장 정직하게 위로한다. 6년 전, 아버님이 돌아가셨다는 병원의 연락을 받고 시골 영안실로 내려가던 그 길의 공기를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정신없이 운전대를 잡고 내려가면서도 마음 한쪽은 자꾸 병원 앞에 붙들려 있었다. 코로나19는 면회를 가로막았고, 허락된 시간마저 짧았다. 결국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이 오래 가슴을 후벼팠다. 중환자실로 들어가시던 순간, 나를 바라보던 아버님의 눈과 내 눈이 마주쳤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장례를 준비하는 동안에는 슬픔을 제대로 들여다볼 틈도 없었다. 입관 때 편안해 보이던 아버님의 얼굴이 내가 본 마지막 모습이었다. 장례를 마친 날 밤, 방에 들어와 불도 켜지 않은 채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그제야 억눌러 두었던 슬픔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마지막을 함께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아버지와 함께했던 좋았던 일과 서운했던 일, 괜히 화를 냈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무엇보다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중환자실로 들어가시던 때 나를 바라보던 그 눈빛이었다. 소리를 죽이지도 못한 채 한참을 울고 나서야 알았다. 그 눈물이 아버님을 잃은 슬픔을 조금씩 어루만지고 있었다는 것을.


어제는 제주4·3희생자 추념일이었다. 개인의 상실을 떠올리다가도, 어떤 날은 이 땅이 오래 품고 있는 더 큰 상처 앞에서 다시 멈추게 된다. 제주의 오름과 마을에는 아름다운 풍경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폭력으로 희생된 수많은 제주도민의 기억도 함께 남아 있다.


행정안전부는 어제 제78주년 제주4·3희생자 추념식을 제주4·3평화공원에서 열었고, 정부는 추념사를 통해 희생자와 유가족에게 위로를 전했다. 하지만 같은 날 추념식 현장 주변에서는 극우 성향 단체와 유튜버들이 집회를 벌이거나 충돌을 일으켰다는 보도도 이어졌다. 애도의 자리조차 온전히 지켜지지 못하는 현실 앞에서, 우리는 아직 이 비극을 충분히 위로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어제 4·3을 생각하며, 아버님을 떠나보낸 기억도 함께 떠올렸다. 물론 그 깊이가 유족들의 세월과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타인의 고통에 조금이나마 다가설 수 있는 것은, 나 역시 잃어본 사람의 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최근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가 다시 회자되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어떤 상실은 지나간 일이 아니라, 오래 남아 사람의 몸과 마음에 머무는 감각이기 때문이다.


“눈처럼 가볍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눈에도 무게가 있다. (…) 이상하다. 살아 있는 것과 닿았던 감각은, 불에 데었던 것도, 상처를 입은 것도 아닌데 살갗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107쪽


살아 있는 것과 닿았던 감각이 지워지지 않는다는 이 문장을 읽을 때마다, 나는 아버님의 마지막 눈빛을 잊지 못하는 마음을 떠올린다. 그리고 유족들이 수십 년 동안 버텨온 삶의 무게도 생각하게 된다. 어제 추모행사를 훼방했다는 뉴스에 화가 치밀어 오른 것은, 어쩌면 그 역사를 잠시라도 잊고 살았던 나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주말 아침이지만, 우리 곁을 떠난 소중한 생명들을 생각하며 모차르트의 「프리메이슨 장송음악」 마우러리셰 트라우어무지크(Maurerische Trauermusik) K.477을 선곡했다. 이 곡은 1785년 프리메이슨 장례 의식과 관련해 쓰였고, 같은 해 11월 세상을 떠난 두 프리메이슨 동료, 게오르크 아우구스트 폰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와 프란츠 에스테르하지 폰 갈란타를 기리는 의식에서 연주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 작품에는 그레고리오 성가의 토누스 페레그리누스 성격이 스며 있어, 울음을 부추기기보다 슬픔을 낮고 길게 붙들어 주는 느낌이 있다.


모차르트 역시 가족의 죽음을 가까이에서 겪으며 살았다. 그는 1778년에 어머니를 잃었고, 1787년에 아버지를 잃었다. 콘스탄체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여섯 자녀 가운데 넷도 먼저 떠나보내야 했다. 그래서인지 이 장송음악에는 비탄을 크게 드러내는 몸짓보다, 슬픔을 아는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절제와 어두운 품위가 배어 있다. 살아 있는 날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사람이 쓴 음악처럼 들린다.


슬픔이 슬픔을 위로한다는 말을 나는 믿는다. 6년 전 세상을 떠난 아버님도, 제주4·3으로 희생된 분들도,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닐 것이다. 남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유족의 가슴 속에서, 그리고 어떤 날 문득 되살아나는 눈빛과 목소리 속에서 오래 머물고 있을 것이다. 살아 있는 사람의 몫은 그 기억을 함부로 덮어두는 일이 아니라, 잊지 않은 채 오늘을 살아가는 일인지도 모른다.(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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