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ahms: Symphony No. 4 in E Minor 4악장
어제 저녁, 여의도 윤중로의 벚꽃길을 다녀왔습니다. 봄이 온 줄 알고 얇게 입고 나섰는데, 막상 강변을 스치는 바람은 생각보다 차가웠습니다. 몇 번이고 옷깃을 여미며 걷다가, 괜히 가벼운 차림으로 나선 나를 탓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길을 걷는 동안만큼은 차가운 공기마저 봄의 일부처럼 느껴졌습니다.
윤중로의 벚꽃은 참 아름답게 피어 있었습니다. 흰 꽃잎은 가로수 위에 조용히 머물러 있었지만, 보도 위로 비친 조명이 닿는 순간 그 빛깔은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붉은빛으로 번지다가도 노란빛으로 흔들리고, 다시 푸른빛과 보랏빛으로 스치며 꽃잎마다 다른 얼굴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곁에는 낮은 키의 개나리가 봄을 먼저 알리듯 서 있었고, 같은 높이쯤에서 묵묵히 피어 있는 흰 목련도 함께 밤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꽃은 저마다 다른 빛과 다른 표정으로 서 있었지만, 그 풍경 전체는 분명 봄이었습니다. 아직 공기는 차가운데도, 눈앞의 계절만은 분명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벚꽃을 우리 봄의 전령사처럼 여기지만, 그 역사를 들여다보면 조금 복잡한 마음이 듭니다. 오늘의 여의서로 벚꽃길은 1968년에 추진한 여의도 개발의 시간과 함께 형성되었고, 지금은 영등포를 대표하는 봄꽃길로 자리 잡았습니다. 영등포문화재단 자료는 이 일대에 1,886주의 왕벚나무(Prunus itosakura f. ascendens)가 이어져 있다고 설명합니다.
한편 벚꽃은 한동안 일제강점기의 기억과 겹쳐 불편한 시선을 받기도 했지만, 제주 봉개동과 신례리의 왕벚나무 자생지가 국가유산으로 보호되고 우리 땅의 식생이라는 점이 다시 주목되면서 그 의미도 함께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벚꽃을 바라보는 마음에는 단순한 감상 그 이상의 것이 남습니다. 환하게 피어 있는 꽃잎 뒤로, 굴곡진 시간이 함께 겹쳐 보이기 때문입니다.
벚꽃의 정점은 늘 이별과 맞닿아 있습니다. 그토록 오래 기다렸건만, 만개한 지 며칠도 못 가 바람에 속수무책으로 흩어집니다. 하지만 짧아서 더 깊이 새겨지는 아름다움도 있습니다. 완벽한 마침표를 찍지 못하고 미완으로 남는 삶처럼, 벚꽃은 지는 순간까지도 우리 마음에 긴 잔상을 남깁니다.
어쩌면 봄은 따뜻함으로만 오는 게 아닐지도 모릅니다. 여전히 옷깃을 여머야 하는 서늘함 속에서도, 다시 시작해도 좋다고 등을 떠미는 단호한 생명력. 그것이 오히려 봄의 본질에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이런 벚꽃의 정서는 오늘 함께 들을 브람스(Johannes Brahms)의 교향곡 제4번 E단조, 작품 98과도 어딘가 닮아 있습니다. 이 곡은 브람스가 남긴 마지막 교향곡입니다. 이 작품에서 브람스는 자신이 닮고 싶었던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의 '고통을 넘어 환희로' 가는 전형을 과감히 버렸습니다.
그와 함께 40년 넘게 음악적 연인이자 영혼의 동반자로 지냈던 클라라 슈만은 이 곡을 듣고 "브람스 음악은 투박한 껍질 안에 가장 달콤한 알맹이가 들어있는 열매"라고 평했습니다. 브람스는 아침마다 아주 진하고 독한 블랙커피를 즐겨 마셨는데, 마지막 이 교향곡이 마치 쓰디쓴 커피 맛을 닮았다고도 합니다. 클래식 칼럼니스트 이재훈 씨는 저서 <소설처럼 아름다운 클래식 이야기>에서 이 곡의 쓸쓸하면서도 깊은 풍미를 그렇게 소개했습니다.
그는 오늘 들을 4악장 피날레를 베토벤의 전형인 화려한 승리의 선언으로 치닫게 하는 대신, 바로크(Baroque)풍의 파사칼리아(Passacaglia)와 변주곡으로 장식했습니다. 그래서 이 음악은 벚꽃처럼 환하게 피어나는 봄의 표정보다, 그 꽃을 보고 돌아온 뒤 마음속에 오래 남는 서늘한 여운에 더 가깝게 들립니다.
브람스의 삶을 떠올리면 이 악장이 더 깊게 다가옵니다. 브람스의 절친한 벗이었던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요아힘(Joseph Joachim)은 젊은 시절부터 자신의 좌우명으로 '자유롭게, 그러나 고독하게(Frei aber einsam)'를 사용했습니다. 독일어 앞 글자를 따서 'F-A-E'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브람스는 이에 응답하듯 '자유롭게, 그러나 즐겁게(Frei aber froh)'를 자신의 좌우명으로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의 음악에는 늘 기쁨만이 아니라, 기쁨 뒤에 남는 그늘과 절제가 함께 있습니다. 특히 4번 교향곡의 마지막 악장은 쉽게 풀리지 않는 감정과 끝까지 버텨내는 품위를 동시에 품고 있어서, 봄밤의 벚꽃길을 걷고 돌아온 아침과 묘하게 잘 어울립니다.
어제 보았던 윤중로 위 벚꽃들의 찬란한 향연, 그리고 그 이면에 숨겨져 있던 서늘한 바람을 기억하며, 오늘은 브람스의 마지막 교향곡 4번 E단조 가운데 피날레인 4악장을 듣고 싶습니다. 만개한 꽃잎처럼 환하기만 한 음악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본 뒤에도 마음 깊은 곳에 조용히 남아 있는 무게를 들려주는 음악이기 때문입니다.
Brahms: Symphony No. 4 in E Minor, Op. 98: IV. Allegro energico e passionato
Berliner Philharmoniker · Claudio Abbado
https://youtu.be/s71pegGaWKU?si=09ia2ClNF2tUPVuF
19세기 후반 유럽 음악계는 혁신을 부르짖는 바그너/리스트파와 전통적인 형식을 중시하는 브람스파로 나뉘어 격렬하게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브람스는 '신독일악파'의 파상공세 속에서 베토벤으로부터 이어진 고전적 형식을 어떻게 계승하고 발전시킬 것인지 고민했습니다.
오늘 듣는 4악장은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의 기법인 샤콘느(Chaconne) 형식을 차용했습니다. 옛 형식을 빌려와 가장 현대적이고 비극적인 정서를 담아냈다는 점에서 음악사적으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합니다.
브람스는 1884년과 1885년 여름, 오스트리아의 휴양지 뮈르츠추슐라크(Mürzzuschlag)에서 이 곡을 썼습니다.
"체리 맛이 너무 셔서": 브람스는 이 곡을 친구에게 소개하며 "이곳의 기후가 추워 체리가 익지 않아 맛이 매우 시다. 내 음악도 그 체리 맛처럼 시큼할 것"이라고 농담 섞인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는 곡 특유의 쓸쓸하고 고독한 분위기를 비유한 것입니다.
초연의 당혹감: 처음 이 곡을 피아노 연주로 접한 지인들은 4악장의 엄격하고 무거운 분위기에 당혹감을 표했습니다. 비평가 한슬릭조차 "두 명의 똑똑한 사람이 매를 맞는 기분"이라고 평했을 정도였으나, 오케스트라 초연 이후 이 곡은 곧 브람스 최고의 걸작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이 악장은 8마디 단위로 반복되는 주제를 바탕으로 한 30여 개의 변주곡 형식입니다.
음과 멜로디의 구성
주제(Theme): 도입부에서 관악기가 강렬하게 뿜어내는 8마디의 주제는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칸타타 150번 <주여, 당신을 갈망하나이다>의 샤콘느 주제에서 가져왔습니다.
변주(Variation): 주제가 반복될 때마다 리듬, 화성, 선율이 끊임없이 변모하며 비극적 에너지를 축적합니다.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하나의 씨앗이 거대한 나무로 자라나듯 유기적으로 연결됩니다.
악기의 활용
트롬본의 등장: 브람스는 이 교향곡의 1, 2, 3악장 내내 트롬본을 아껴두었다가, 4악장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등장시킵니다. 이는 곡의 장엄함과 종교적 엄숙함을 더하는 장치입니다.
플루트 독주: 중간 부분(제12변주)에서 흘러나오는 플루트의 애절한 독주는 마치 깊은 고독 속에서 부르는 노래와 같습니다. 금관의 강렬함 뒤에 찾아오는 이 정적은 곡의 슬픔을 더욱 극대화합니다.
느낌의 전개
비극적 투쟁: 초반부는 엄격한 질서 속에서 강한 에너지를 발산하며 나아갑니다.
회상과 성찰: 중간 부분에서는 템포가 늦춰지며 내면적인 성찰과 쓸쓸한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최후의 저항: 후반부로 갈수록 감정은 더욱 격정적으로 변하며, 마지막 코다(Coda)에서는 어떤 타협도 거부하는 듯한 단호하고도 처절한 마침표를 찍습니다.
아바도의 지휘는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이 구조물에 숨을 불어넣어, 브람스가 숨겨둔 세밀한 감정의 결을 명징하게 드러내 줍니다. 가을의 끝자락에서 마주하는 찬 바람처럼, 서늘하면서도 뜨거운 감동을 주는 악장입니다.
어제 윤중로에서 본 벚꽃들은 따뜻한 봄볕 속에 있지 않았습니다. 살을 에듯 차가운 강바람을 맞으면서도, 그 서늘한 공기 속에서 저마다의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었습니다.
봄은 거창한 선언처럼 오지 않는 것 같습니다. 길가의 나무 위에 조용히 앉아 있다가, 어느 순간 문득 알아차리게 되는 방식으로 찾아옵니다. 브람스(Johannes Brahms)가 긴 고독 속에서도 자신의 음악을 써 내려갔듯, 우리의 계절 또한 시린 바람을 견디며 조금씩 깊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이 완전히 따뜻하지 않아도 괜찮고, 아직 마음이 다 풀리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꽃은 늘 우리보다 먼저 피어, 시작이 이미 곁에 와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바람은 차갑고 밤공기에는 겨울의 잔기운이 여전했지만, 꽃은 이미 그 자리에 도착해 있었습니다. 계절은 늘 그렇게 우리보다 앞서 와 있나 봅니다.
아직은 서늘한 이 아침, 브람스의 교향곡 4번 4악장을 함께 듣습니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끝내 자리를 지키던 어젯밤의 벚꽃처럼, 오늘이라는 시간도 그렇게 조용히 흘러가면 좋겠습니다.(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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