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전쟁의 명분도 보편적 인권보다 높을 수 없다

LA MISIÓN. El oboe de Gabriel

by 메이슨
la mission6.jpg

1592년 4월, 도요토미 히데요시(Toyotomi Hideyoshi)의 군대는 700여 척의 배를 앞세워 부산 앞바다를 검게 뒤덮었습니다. 그날 조선의 바다는 평소와 다름없이 평온했을 것입니다. 바다에 나가 그물을 던지는 어부가 있었고, 아침 안개 속에서 빨래를 널며 소박한 하루를 꾸려가는 이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텃밭을 일구는 거친 손길과 아무것도 모른 채 골목을 뛰노는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 그러나 권력자의 비정한 야심은 늘 그렇게 평범한 이들의 가장 낮은 하루부터 먼저 짓밟고 들어옵니다.


일본의 침략군은 1592년 4월 13일 부산포에 상륙했고, 이 전쟁은 곧 조선 전역을 초토화한 임진왜란으로 번졌습니다. 역사는 이를 '전쟁'이라는 거대한 추상어로 기록하지만, 그 이면에 실재했던 것은 잔혹한 학살이었고, 무자비한 약탈이었으며, 삶의 터전에 대한 철저한 파괴였습니다. 국가 간의 전쟁은 늘 왕과 장수의 이름으로 남지만, 정작 먼저 죽고, 먼저 빼앗기며, 먼저 불타버리는 것은 언제나 이름 없는 백성들과 민간인의 삶이었습니다.


우리 민족에게 도요토미 히데요시(Toyotomi Hideyoshi)는 단순히 먼 나라의 옛 권력자가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야욕을 위해 이웃 나라의 평화를 유린한 '침략자'의 다른 이름으로 각인되어 있습니다. '정명가도(征明假道)'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웠으나, 그 화려한 수사가 조선 백성들의 피맺힌 삶을 단 한 순간도 보호해주지는 못했습니다.


브리태니커는 히데요시가 조선을 넘어 명나라까지 정복하려 했던 제국적 망집을 품고 있었으며, 그 결과로 두 차례나 조선을 침략했다고 기술합니다. 늘 그렇듯 침략전쟁은 거창한 명분의 옷을 입고 시작되지만, 그 끝에서 소리 없이 무너지고 울부짖는 것은 결국 힘없는 사람들입니다. 전쟁은 권력자의 야심으로 시작되어, 민간인의 휑한 고통으로 남겨질 뿐입니다.


요즘 텔레비전 화면 속 가자지구와 레바논, 그리고 이란을 둘러싼 비극적인 전쟁 장면들을 보고 있으면, 그 오래된 얼굴이 낯설지 않게 되살아납니다. 시대가 변하고 내세우는 명분이 달라졌을지언정, 강한 자가 자신의 필요를 위해 약한 이웃의 삶을 무너뜨리는 야만의 문법은 놀라울 만큼 닮아 있습니다.


로이터(Reuters) 통신은 2026년 4월 13일 보도에서, 가자 전쟁으로 인해 이미 7만 2천 명이 넘는 팔레스타인인이 숨졌다고 전했습니다. 전쟁을 일으키는 이들은 언제나 안보를 강조하고 질서를 부르짖으며 '어쩔 수 없는 필요'를 강변합니다. 그러나 아이가 죽고, 집이 무너지고, 부모가 자식을 가슴에 묻으며 한 공동체의 일상이 통째로 폐허가 되는 순간, 그 명분은 더 이상 '인간의 언어'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강자의 논리이자 차가운 '힘의 언어'일 뿐입니다.


그 처참한 장면들 위로 히데요시가 겹쳐 보이고, 오늘날의 베냐민 네타냐후(Benjamin Netanyahu)가 떠오르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내부의 정치적 위기와 권력의 불안, 그 비정한 계산과 야심이 어떻게 외부를 향한 칼날로 변하는지, 그 과정에서 민간인의 생명과 존엄이 얼마나 손쉽게 지워지는지를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목도하고 있습니다. 강한 자는 늘 자신의 사정을 먼저 말합니다. 국가의 안보, 체제의 존속, 정치적 필요, 지지층의 결집이라는 거창한 이유들을 늘어놓습니다.


하지만 무너진 집더미 앞에 선 아이에게 그 어떤 설명도 정당화될 수 없으며, 가족을 잃고 폐허가 된 골목에서 울부짖는 이에게 국제정치의 치밀한 계산은 아무런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는 한 가지 진실을 분명히 붙잡아야 합니다. 국가의 명분보다 먼저 보호받아야 할 것은 살아있는 사람의 숨결이며, 그 누구도 침범해서는 안 되는 보편적 인권이야말로 인류가 지켜야 할 최후의 보루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더욱 어두운 역사의 한 페이지를 마주하게 됩니다. 캄보디아의 킬링필드는 외부의 침략이 아니더라도, 권력이 자기 백성을 어떻게 숫자로 환산하고 불순물처럼 제거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참혹한 증거였습니다. 브리태니커에 따르면 크메르루주(Khmer Rouge) 정권 아래 캄보디아에서는 1975년부터 1979년까지 처형과 강제노동, 기아와 질병으로 약 150만에서 300만 명에 이르는 고귀한 생명이 스러졌습니다.


폴 포트(Pol Pot)는 타국을 침략한 자는 아니었으나, 인간의 존엄보다 이념과 권력을 앞세운 광기가 어디까지 치닫을 수 있는지를 가장 끔찍하게 보여준 이름입니다. 히데요시, 네타냐후, 폴 포트. 이들은 서로 다른 시대와 체제 속의 인물들이지만, 권력이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통계 수치나 정권의 도구로 여기기 시작하는 순간 학살과 파괴는 언제든 '대의'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된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영화 《미션(The Mission)》이 세대를 넘어 우리 가슴에 남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영화는 식민 권력의 탐욕과 제국의 이해관계 앞에서 원주민들의 소박한 삶이 어떻게 무력하게 짓밟히는지를 고발합니다. 엔니오 모리코네(Ennio Morricone)의 메인 테마는 승리자의 개선 행진곡이 아닙니다. 그것은 폭력의 시대 속에서도 결코 굴복하지 말아야 할 인간의 존엄을 나직하게 붙들어 주는 성스러운 기도이자 위로의 찬가입니다.


침략은 늘 거대한 깃발을 앞세우고 요란하게 들어오지만, 음악은 그 화려한 깃발 뒤에 숨겨진 가냘픈 사람의 얼굴을 마주하게 합니다. 그래서 이 선율은 오늘 같은 날, 우리가 강자의 논리가 아닌 오직 인간의 편에 서야 한다는 그 절박한 마음을 더욱 선명하게 일깨워줍니다.


오늘 아침 하늘은 눈부시게 맑습니다. 쏟아지는 햇살을 보니 오늘도 얇은 외투조차 거추장스럽게 느껴지는 초여름 날씨가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누리는 이 평온한 아침에도, 세계의 다른 곳에서는 대를 이어온 집이 무너지고, 아이들이 죽어가며, 평범한 사람들의 하루가 전쟁의 포연 속으로 힘없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Tacitus)는 일찍이 “그들은 황무지를 만들어놓고 그것을 평화라고 부른다”고 말하며 권력의 기만을 경계했습니다. 폐허 위에 세워진 질서는 결코 평화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결국 우리 인류는 반드시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할 가치가 있습니다. 어느 나라의 국민이든, 어떤 종교를 믿든, 어느 땅에 발을 딛고 살든, 어린아이와 무고한 민간인의 생명은 결코 정치적 계산의 소모품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보편적 인권은 가장 약한 자의 삶까지 동일한 무게로 보호할 때 비로소 그 진정한 의미를 획득합니다. 이재명 대통령이 2026년 4월 12일 천명한 것처럼, “각국의 주권과 보편적 인권은 존중되어야 하고, 침략전쟁은 부인되는 것이 우리의 헌법 정신이자 국제적 상식”입니다. 그 단순하고도 준엄한 기준을 다시금 마음에 새기며, 비정한 힘의 언어가 아니라 따뜻하고 질긴 인간의 언어를 끝까지 붙들고자 합니다.(마침)


(음악감상) LA MISIÓN. El oboe de Gabriel - Vita Nostra. E. Morricone. Director: Andrés Salado

https://youtu.be/ussEFHEjrOQ?si=qURihA1Bra-cHZxL

영화 *미션(The Mission, 1986)*의 사운드트랙은 종교와 인종, 언어의 벽을 넘어 인간의 영혼을 울리는 인류의 문화유산입니다. 특히 2024년, 소외된 이웃에게 희망을 전하는 'Voces para la Paz(평화를 위한 목소리)' 무대에서 울려 퍼진 이 선율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감동이었습니다.


엔니오 모리꼬네의 천재성과 휴머니즘이 응축된 이 곡의 세계로 여러분을 안내합니다.


1986년, 이탈리아의 거장 엔니오 모리꼬네(Ennio Morricone)는 영화 미션의 편집본을 보고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남미의 거대한 폭포와 울창한 정글, 그리고 그 속에서 벌어지는 비극적인 역사가 너무도 압도적이었기에, 그는 "내 음악이 이 위대한 영상의 미학을 오히려 해칠까 두렵다"며 작곡을 고사하려 했죠. 하지만 끈질긴 설득 끝에 탄생한 이 곡은 영화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사운드트랙이 되었습니다.


당시 80년대는 신시사이저를 활용한 현대적 사운드가 유행하던 시기였지만, 모리꼬네는 18세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의 시대상을 반영해 '바로크 음악의 우아함' '원주민의 토속적 생명력'이라는 이질적인 두 요소를 결합하는 파격을 선보였습니다.


특히 제레미 아이언스가 폭포 위에서 오보에를 부는 명장면에는 재미있는 비화가 있습니다. 촬영 당시 배우는 실제 악보 없이 손가락을 움직였는데, 나중에 모리꼬네가 배우의 그 어설픈 손가락 움직임을 하나하나 분석하여 그 운지법에 딱 맞는 멜로디를 역으로 작곡해 냈습니다. 영상이 음악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배우의 몸짓에서 음악을 탄생시킨 천재적 에피소드입니다.(마침)

작가의 이전글블랙데이, 짜장면 한 그릇에 담긴 솔로들의 유쾌한 반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