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한다는 것, 공존한다는 것, 화해한다는 것

영화 「두 교황(Two Popes)」의 여운

by 메이슨

고백은 부끄러운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이고, 화해는 그 뒤에야 겨우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영화 「두 교황(Two Popes)」를 보며 공존과 반성의 의미를 오래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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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점심, 커피가 마시고 싶어 읽던 책을 덮었습니다. 텀블러를 들고 자주 가는 한티역 옆 스타벅스로 갔습니다. 아메리카노를 받아 들고 나오는데, 식사를 하고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디로 갈까 잠시 망설이다가, 혼자 먹는 점심이니 편하게 먹자 싶어 PC방으로 갔습니다. 영화 한 편을 틀어놓고 밥을 먹고 싶었습니다. 김치볶음밥을 시키고 넷플릭스를 열어 영화를 골랐습니다.


딱히 꼭 봐야겠다고 눈길이 가는 영화는 없었습니다. 그러다 제목이 낯선 영화 하나에서 시선이 멈췄습니다. 「두 교황(Two Popes)」이었습니다.


식사를 하며 영화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교황을 다룬 영화는 「콘클라베」를 빼면 두 번째였습니다. 처음에는 교황청 안의 정치적인 이야기쯤 되겠거니 하고 별 기대 없이 틀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스크롤이 올라갈 때까지 자리를 뜰 수가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것은, 자진 퇴위로 바티칸과 세계를 뒤흔든 베네딕토 16세 교황과 그 뒤를 이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이야기가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가톨릭 신자인 저로서는, 왜 이런 시기가 있었다는 것을 이제야 깊이 들여다보게 되었을까 하는 놀라움도 컸습니다.


영화 속에는 가톨릭의 전통을 수호하려는 베네딕토 16세와, 세상이 움직이는 만큼 교회도 변해야 한다고 믿는 프란치스코 추기경이 나옵니다. 베네딕토는 원칙을 중시하는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클래식 음악과 피아노를 가까이하는 모습도, 프란치스코가 아바(ABBA)의 노래를 흥얼거리고 축구 이야기를 꺼내는 장면과 선명하게 대비되었습니다.


베네딕토는 프란치스코의 생각에 쉽게 동의하지 않습니다. 교회를 바라보는 태도도,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방식도, 좋아하는 것도, 말하는 방식도 다릅니다. 아마 끝까지도 다 동의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영화가 제게 깊게 남은 것은, 끝내 같아지지 못하는 사람도 함께 갈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동의하지 않아도 존중할 수 있고, 받아들이지 못해도 공존할 수 있다는 것. 그 당연한 말을, 우리는 실제 삶에서는 자주 놓치고 사는 것 같습니다.


프란치스코 추기경은 아르헨티나 군부독재 시절, 예수회 신부들과 신자들을 지키려다가 군부와 타협했던 자신의 과거를 오래도록 부끄러워하며 살아온 사람으로 나옵니다. 민주화 이후에는 어떤 이들에게 배신자라는 비난도 받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상처를 안은 채 오히려 사람들의 생활 속으로 들어갑니다. 낮은 자리에서,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려고 애씁니다.


반면 베네딕토는 사제들의 어린이에 대한 성추행 사건과 교회 안의 여러 문제 앞에서 자신이 외면했거나 충분히 바로잡지 못한 일들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교회 안의 재정 비리와 은행 비리 앞에서도, 교황으로서 다 감당하지 못한 자신의 비겁함을 자책하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이 둘의 공통점은 영화 속에서 “주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말이 오래 남았습니다. 정말로 주님의 목소리를 못 듣는다는 뜻이기도 하겠지만, 제게는 자기 안의 잘못을 아직 용서받지 못한 사람의 말처럼 들렸습니다.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고, 그래서 하느님의 용서도 멀게 느끼는 사람의 말처럼 들렸습니다. 영화가 끝으로 가는 길목에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고해성사를 해줍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다시 주님의 목소리를 듣기 시작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장면들을 보는데, 제 마음도 편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거의 매주 토요일 어머님을 모시고 성당에 갑니다. 미사를 드립니다. 그런데도 제 안의 부끄러움과 죄책감은 쉽게 지워지지 않습니다. 한 평도 안 되는 고해실에 들어가는 일이 저는 아직도 두렵습니다. 나의 잘못을 입 밖으로 꺼내 고해한다는 것이 너무 부끄럽고, 너무 힘들고, 또 무섭습니다. 가톨릭 신자라면 이 마음을 조금은 알 것입니다.


6년 전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그랬습니다. 입관 전에 신부님이 오셔서 아버님을 위해 미사를 드리기 전, 저는 고해성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때도 제대로 고해하지 못했습니다. “기억 못하는 일까지 용서를 빈다”는 식으로 짧게 말하고 나왔습니다. 사실은 제 마음 깊은 곳에 부끄럽고 잘못된 일들이 여전히 남아 있었고, 무엇이 잘못이었는지 스스로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기억 못하는 일”로 뭉뚱그려 버렸습니다.


고해를 하고 나왔는데 오히려 죄가 하나 더 보태진 느낌이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또 하나의 거짓을 더 얹고 나온 기분이었습니다. 지금도 비슷합니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고 나서는, 저도 조만간 조용한 시간을 내어 고해성사를 하러 가야겠다는 생각을 더 깊이 하게 되었습니다.


영화 속 두 사람의 첫 만남은 차이를 확인하는 자리였습니다. 서로의 생각이 다르다는 사실을 부드럽게 덮어두지 않습니다. 베네딕토 교황은 추기경의 생각과 취향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각자의 자리로 흩어집니다. 저는 그 장면이 좋았습니다. 억지 화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르다는 것을 다르다고 말하는 데서부터, 어쩌면 진짜 대화가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후 혼자 식사하는 베네딕토 교황의 모습이 나옵니다. 교황이 대접한 음식은 크뇌델(Knödel)이라 불리는 독일·오스트리아권 만두 요리입니다. 교황의 어머니가 해주셨던 방식 그대로라는데, 사실 보기에는 그리 맛있어 보이지 않습니다. 식사 후 두 사람은 다시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눕니다. 교리와 성경 말씀, 교회와 세상, 사람이 떠나가는 이유에 대해 말합니다. 그러다 갑작스러운 일로 교황이 로마로 향하게 되고, 추기경도 헬기에 함께 오릅니다. 그 안에서 추기경은 정원사에게 꽃을 받은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자 교황은 인기가 좋다고 말합니다. 그때 추기경이 이렇게 답합니다. “제 모습으로 다가가려고 애쓸 뿐입니다.”


저는 그 대사가 참 좋았습니다. 실제 프란치스코 교황도 재위 기간 내내 자신의 모습으로 세계 사람들에게 다가가려 했던 분이었습니다. 2014년 한국 방문 때 세월호 유족이 달아준 노란 리본을 달고 그들을 위로했던 모습도 떠올랐습니다. 그 유명한 말도 다시 생각났습니다. “인간의 고통에는 중립이 없습니다.” 누군가의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키겠다는 태도는 결국 고통받는 사람들을 외면하는 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본 것이고, 사람은 고통받는 이들의 편에 서야 한다는 뜻을 분명히 전한 것입니다.


영화에서 추기경이 들려주는 짧은 이야기도 잊히지 않습니다. 어떤 신자가 신부님께 “기도하면서 담배를 피워도 되나요?”라고 물었더니 신부님이 “안 됩니다”라고 답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자 추기경은 질문이 잘못되었다고 말합니다. “담배를 피우는 동안 기도해도 됩니까?”라고 물었다면 “당연히 된다”는 대답을 들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 부분을 듣고, 말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사람은 이해를 구할 수도 있고 스스로를 가둘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동시에 프란치스코가 하고 싶은 말도 느껴졌습니다. 주님을 생각하고 기도하는 일은 때와 장소와 형식에만 갇혀서는 안 된다는 것, 교회가 사람들을 교회 안으로만 불러들이려 하기보다 사람들의 생활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 말입니다. 저는 그 장면을 그렇게 받아들였습니다.


영화 속에는 교황청의 장엄한 공간들이 여러 번 나옵니다. 미켈란젤로의 천장화와 「최후의 심판」이 있는 시스티나 경당을 거닐며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눕니다. 그 거룩한 공간 안에서 추기경은 자신의 어두운 과거와 수치를 고백합니다. 교황은 그것을 고해로 받아줍니다. 그리고 일반인 입장 시간이 되어 뒤편 공간으로 자리를 옮긴 뒤, 비서에게 부탁해 교황청 앞 피자 가게에서 사 온 피자를 함께 먹으며 다시 이야기를 나눕니다. 환타 한 병을 나누어 마시며 길거리 피자를 먹는 두 교황의 모습은, 이 영화에서 가장 비현실적이면서도 가장 인간적인 장면이었습니다.


식사를 마친 뒤에는 이번에는 교황이 추기경에게 자연스럽게 고해성사를 합니다. 저는 이 두 장면이 참 좋았습니다. 이 장면들에는 거창한 선언이 없습니다. 누가 옳고 누가 틀렸다는 판정도 없습니다. 다만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자기 안의 부끄러움을 먼저 내어놓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며, 정통과 진보의 화해라는 것도 결국 그렇게 시작되는 것이겠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화해는 좋은 말 몇 마디로 되는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화해는 먼저 반성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용서를 구합니다. 그다음에야 화해가 옵니다. 그렇다고 화해했다고 해서 서로의 생각이 같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끝까지 다를 수 있습니다. 다만 그 다름을 없애려 하지 않고, 서로의 생각을 존중하는 데까지 가는 것. 저는 그것이 화해라고 생각합니다.


또 보수적인 베네딕토 교황이 떠나는 프란치스코 추기경에게 자신의 앨범을 건네는 장면도 오래 남았습니다. 비틀즈(The Beatles)가 「Abbey Road」의 곡들을 녹음했던 바로 그 애비 로드 스튜디오(Abbey Road Studios)에서 녹음된 자신의 피아노곡이 담긴 음반이었습니다. 아바(ABBA)의 「Dancing Queen」을 휘파람으로 불던 추기경과는 음악 취향도 달랐지만, 바로 그 다름 속에서도 두 사람이 음악으로 조용히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대한민국 국회를 보면 더 답답합니다. 화해할 마음이 없어 보입니다. 왜 그런가 생각해 보면, 화해의 시작인 반성이 없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자기 잘못을 먼저 돌아보는 사람이 드물기 때문입니다. 상대를 몰아세우는 말은 많지만, 자기 안의 부끄러움을 먼저 인정하는 말은 적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는 제게 사회보다 더 가까운 한 사람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저는 아직 동생과 화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저부터 제대로 반성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니, 반성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동생도 아마 비슷하겠지요. 누구의 잘못이 더 큰가를 따지는 일은 오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는 끝내 화해에 닿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영화를 보고, 고해성사부터 다시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주님, 저에게 용기를 주세요. 요즘 저는 그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영화 후반부에서 교황은 13세기에 살아생전 교황직을 내려놓은 전례를 떠올리며 자신도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결국 추기경이 교황이 됩니다. 영상은 새 교황이 시민 앞에 나와 인사하는 장면으로 이어지고, 실제 베네딕토 16세 교황과 프란치스코 교황의 영상이 함께 흐릅니다.


이어 두 사람이 월드컵 결승전에서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모국인 독일과 프란치스코 교황의 모국인 아르헨티나가 맞붙는 경기를 함께 관람하는 장면으로 영화는 끝이 납니다. 실제로는 두 분 모두 경기를 보지 않았다고 하지만, 영화는 이 상징적인 장면을 통해 공존의 정점을 보여줍니다. 생각이 다른 두 사람이 같은 자리에 앉아 함께 웃고, 함께 즐거워할 수 있다는 것. 저는 그 장면이 오래 남았습니다.


또 하나, 제 마음에 남은 장면이 있습니다. 교황이 아르헨티나로 떠나는 추기경을 배웅하는 장면입니다. 그때 추기경은 교황에게 탱고를 알려줍니다. 어색해하고 싫어하는 교황을 억지로 안다시피 하며 탱고를 춥니다. 저는 그 장면이 보수와 진보가 서로를 인정하며 한 걸음 맞춰보는 장면처럼 느껴졌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마치 나와 우리 아이들이 서로를 받아들이는 모습 같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더 솔직히 말하면, 언젠가 동생과 내가 그렇게 어색하게라도 한 걸음 맞춰보는 장면으로도 상상되었습니다.


교황의 죽음으로 시작해 새로운 교황이 선출되는 과정을 묵직하게 그려낸 영화 「콘클라베」보다, 제게는 이 영화가 더 오래 남았습니다. 「두 교황」은 권력의 영화라기보다, 실수하고, 부끄러워하고, 용서를 구하고, 끝내 함께 살아가려는 인간의 영화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혹시 아직 보지 않으셨다면, 종교를 떠나 한 번 보셨으면 합니다. 생각이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화해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시작이 어디에서 오는지 조용히 돌아보게 하는 영화였습니다. 적어도 제게는 그랬습니다. 공존은 누가 더 옳은지를 가려내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먼저 자기 안을 들여다보는 일, 어쩌면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것 같았습니다. 화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상대를 바꾸는 일이 아니라, 내가 외면해왔던 부끄러움을 인정하는 데서 겨우 첫걸음을 떼는 일이었습니다.


이 영화는 두 교황의 이야기를 하지만, 제게는 결국 제 이야기로 남았습니다.(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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