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갑옷, 양심의 얼굴

[아주 주관적인] 쿠팡의 ‘동일인 지정’ 논란을 읽고

by 메이슨

거대 기업의 힘은 돈이 아닌 '문장'에서 나옵니다. 쿠팡의 동일인 지정 논란과 한미 안보 협의 연계 시도를 통해, 자본의 논리가 어떻게 공공의 언어를 잠식하는지, 그리고 그 곁에서 양심을 파는 지식인들의 변절을 역사 속 '이사(李斯)'의 최후에 비추어 경계하시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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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쿠팡의 ‘동일인 지정’ 논란을 보며 내가 먼저 본 것은 법리 해석의 복잡함이 아니었다. 거대한 기업의 힘이 돈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 힘은 늘 문장을 필요로 한다. 책임을 ‘차별’로 바꾸고, 실질적 지배력 논란을 ‘기술적 요건’으로 덮으며, 시민의 문제 제기를 ‘과도한 규제’로 돌려세우는 문장들. 돈은 숫자로 움직이지만, 책임 회피는 늘 세련된 말로 포장된다.


2026년 4월 23일, 쿠팡은 김범석 의장을 동일인으로 지정해야 한다는 시민단체의 주장에 대해, 예외 요건을 모두 충족한다며 즉각 반박했다. 회사는 미국 상장사의 지배구조가 한국 재벌의 사익편취 우려와는 무관하며, 이를 규제하는 것이 오히려 차별이라고 주장했다. 같은 날 경실련은 김 의장이 최종 의사결정권자로서 경영 전반에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지적하며 공정위의 결단을 촉구했다. 공적인 책임과 기업의 논리가 팽팽하게 맞선 장면이었다.


씁쓸한 것은 그 논리를 만드는 사람들이다. 한때 공공의 가치를 말하던 보좌관, 공무원, 언론인들이 이제는 기업의 방패가 되어 시민의 질문을 무력화한다. 제도의 취지와 공적 책임이 어디까지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이들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들의 전문성은 시민의 질문을 선명하게 만드는 데 쓰이지 않는다. 오히려 기업의 회피 논리를 매끈하게 다듬어 조국이 아닌 ‘자본의 방패’가 되는 길을 택한다.


더 불편한 것은 이 문제가 기업 규제의 범위를 넘어 외교와 안보의 언어로 번지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로이터 보도에 따르면, 미국 측이 특정 경영인의 법적 안전 보장과 안보 협의를 연계하려 했고 우리 정부는 이에 선을 그었다. 또한 미국 의원들이 보낸 서한에 대해 우리 정부가 미국 기업에 대한 차별이 없도록 하겠다고 설명해야 했던 상황은 많은 한국인에게 불편하게 읽힐 수밖에 없다.


동맹은 상대국의 법과 절차를 존중하는 바탕 위에서 유지되어야 한다. 개별 기업의 문제를 안보 협의와 연결하는 순간, 그것은 동맹의 언어가 아니라 압박의 언어가 된다. 정부가 “안보와 쿠팡 사안은 별개”라고 선을 그은 것은 동맹을 동맹답게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경계였다. 이 선이 흔들리면 신뢰는 안쪽부터 금이 가기 시작한다.


동양에는 순망치한(脣亡齒寒)이라는 말이 있고, 서양에는 델로스 동맹의 몰락이 있다. 함께 지키자고 만든 약속이 한쪽의 이익을 위한 압박으로 변질될 때 명분은 사라지고 오만만 남는다. 역사에서 동맹이 무너지는 것은 거창한 배신보다, 선을 넘는 작은 오만에서 시작되었다.


정말 답답한 것은 외부의 압박만이 아니다. 그 압박의 언어가 한국 안에서 너무나 빨리 ‘합리적인 논리’로 번역된다는 점이다. 당연한 원칙조차 ‘시장 위축’이나 ‘차별’이라는 말로 둔갑한다. 조걸위학(助桀爲虐)이라 했다. 악한 자를 도와 그 포학함을 키운다는 뜻이다. 불의한 논리를 오래 정리하다 보면 어느덧 근묵자흑(近墨者黑)의 상태에 빠져, 자기가 누구를 위해 일하는지조차 묻지 않게 된다.


역사 속 진나라의 이사(李斯)는 당대 최고의 문장가였으나 자신의 재능을 권력의 왜곡을 정당화하는 데 쏟았다. 그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은 재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 재능이 잘못된 편에 너무 오래 봉사했기 때문이다. 잘못된 편에 선 재능은 당장은 요긴할지 모르나 끝내 그 사람의 이름 석 자까지 무너뜨린다.


이 오만과 변절의 끝에 소비자들의 질문이 남는다. “당신은 아직 ‘탈팡’하지 않았는가?” 이 물음은 단순한 불매의 구호가 아니라, 기업이 공동체의 도리를 다하라는 준엄한 경고다. 그들이 정상적으로 기업 활동을 하겠노라 약속하고 이를 증명한다면 소비자들은 다시 지갑을 열 것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힘을 빌려 조국을 압박한다면 그 불신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기업의 곁에서 문장을 만드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이 지키는 것은 조직의 명예인가, 아니면 잠시 빌려 쓴 논리의 갑옷인가. 한 사람의 경력이 품위를 갖추려면 돈 앞에서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어야 한다. 그 선이 무너지면 기업 하나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기준이 무너진다. 재능이 오만이 되고, 그 오만이 조국을 공격하는 무기가 되는 풍경을 이제는 멈춰야 한다. 당신들에게는 이제 사명감보다 돈이라는 가치가 더 앞서는 것인가.(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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