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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영 Oct 24. 2021

나의 작은 동그라미

마음에 남겨진 순간들

“석영아, 앉아봐봐.”


“네, 선생님.”


선생님은 책상 위에 이면지를 하나 꺼내 놓고 말을 이어가셨다.


“펜 있니?”


“네, (주섬주섬) 여기요.”


“그래. 이제 우리 여기 종이에 각자 작은 동그라미를 그려보자. 서로 보여주지 말고.”


“동그라미요?”


“응. 그려봐. 나한테 보여주지 말고,”


나는 의문이 들었지만, 작은 동그라미를 그렸다. 선생님도 그리셨나 보다. 서로의 동그라미를 숨기고 있는 게 웃겼지만, 호랑이 선생님으로 꽤나 이름을 떨친 분이라 애써 표정을 감췄다.


“다 그렸니?”


“네. 다 그렸습니다.”


“그럼 한 번 보자.”


선생님과 나는 종이에서 손을 떼고 새로 그려진 두 개의 동그라미를 보았다. 나의 동그라미는 새끼손톱만큼 작았고, 그에 비해 선생님의 동그라미는 5배는 되어 보였다.


“봐봐. 다르지. ‘작다’는 건 같은데 너랑 내가 생각한 ‘작다’의 기준이 다른 거야.”


“아...”


“노래도 같아. 이 사람이 땡땡한 소리를 내어도, 얼만큼 땡땡한지는 그 사람만 아는 거야.”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죠?”


“네 손에 달렸지. 뭐.”


‘뭐야. 저게 무슨 설명이야. 사람마다 다르다는 걸 누가 몰라. 나는 이렇게 못 부를 거라는 건가?’


2010년 여름날의 기억이다. 한참 재수 준비 중이던 나는 학원에서 등수를 매기는 원내 모의고사에서도 좋은 성적을 내 몇 단계를 점프하는 등 꽤나 성장세를 보이고 있었다. 지난 고등학교 시절 때에는 노래 실력이 ‘성장’하는 게  피부에 와닿지 않았지만 재수생의 나는 달랐다. 나날이 성장하고 있었고, 이대로라면 일취월장하여 경쟁률이 높은 학교에 도전해볼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굳게 믿었다. 믿음은 믿음으로만 남았고 삼수를 거쳐서 일단 경쟁률이 얼마 되지 않는 학교라도 가보기로 하며 눈높이를 낮췄다. 그리고 군대에 다녀오고, 아쉬운 마음에 다시 사수를, 오수를, 육수를 보았다. 육수가 나올 지경에 겨우 학교에 붙었고 전보다는 만족스러운 학교 생활을 했다.


노래를 연습한  어엿 12년째. 웬만한 가수들은  시간에 성과를 이루고도 새로운 도전을 한다는데, 나는 그에 비하면 미세하다. 먼지가 쌓인 것처럼 투명하기만  나의 경력. 내가 직접 “노래하는 사람이에요.”라고 밝히지 않으면 아무도 모를 것이다. 게다가 요즘엔 배우지 않은 사람들도 멋있게 솜씨를 자랑한다. 전공자보다  전공자 같은 사람이  많다. 여기저기 내밀 곳이 줄어드는 요즘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를 노래하는 사람으로 계속 소개할  있을까?


고민의 답은 나도,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모르겠지만, 감히 단정을 지어보자면 나는 노래하는 사람이 맞다. 길거리를 걷다가도 흥얼거림을 멈출 수가 없고, 타인의 노래를 들으면 분석을 하고 앉아있고, “나 노래하는 사람이오. 근데 취향을 몰랐소.”하고 책도 냈고, 얼마 전에는 축가를 부르고 왔으며, 그 축가를 듣고 또 다른 축가 제의가 왔으며, 노래 연습하던 친구를 만나 깜짝 레슨을 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저 크기가 다른 동그라미 일 뿐이다.


어떤 사람은 일곱 살 때부터 노래를 했네, 친구 따라갔다가 오디션에 붙었네, 법학과를 나왔는데 노래도 잘해서 가수가 되었네 등등 그들의 동그라미가 조금 더 동~그랗고, 그들을 볼 때 쉽게 휘둥~그레 해질 뿐이다. 그들은 더 큰 동그라미를 보고 “나는 아직 멀었어.”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내가 여기서 멈추겠다는 소리는 아니다. “내 동그라미는 충분해.”라고 자기만족할 생각은 더더욱 없다. 다만, 내 크기에 맞게 더 늘려보겠다는 것이다.


꾸준한 것 앞에 장사 없다는데 그 말을 믿고 동그라미를 좀 늘려봐야겠다. 늘려보겠다고 애를 써도 안된다면 모르겠는데, 웃기게도 천천히 늘어나고 있다. 지속적으로 성장하지는 못해도 하루하루를 쌓아서 레벨 업! 하는 날들이 분명히 찾아온다. ‘노래’를 필두로 세우지 못하는 삶을 살더라도, 계속 흥얼거리고 욕심 낼 것 같으니 포기는 내 손해다. 글의 재미를 느끼고 있는 요즘이지만, 글을 쓰러 갈 때, 쓸 때, 쓰고 나서도 음악을 듣고 있으니까. 오늘도 결국 노래 레슨 받았던 내용으로 글을 썼으니까. 노래가 업이 될 수 있을까? 고민만 하던 이십대를 흘려보내고 감히 단언해본다. 난 앞으로도 노래하며 살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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